고객상담센터
항상 친절히 안내하겠습니다.
054-534-0300
상담시간 09:00 - 18:00파종중회 소개
파종중회 소개
휘 득배(得培)
고려 좌대언 증 원충단력안서보정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문하시중 상성군(商城君) 록(祿)의 장자이다.
자는 국자(國滋) 호는 난계(蘭溪)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문충공파의 파조가 된다.
고려26대 충선왕 4년 임자년(1312년)에 출생하며 31대 공민왕 11년 임인년 3월 51세로 별세하셨다.
수충보절정원공신이며 정당문학 도병마사를 지내고 상락군(上洛君)의 봉작을 받았다. 19세에 고려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 전개부령을 거쳐 28대 충혜왕이 원나라에 들어갈 당시 배행하며 숙위하고 경진년에 충혜왕이 환국하여 복위하자 우부대언이 되고 공민왕 6년 정유년 서북면 홍건적과 위정방어 도지휘사 추밀원직학사 전북면도 순문사 겸 서경윤상만호가 되었다. 역적 기철을 복주하여 2등공신이 되고 공민왕 8년 12월 8일 모거경등 사만여명의 홍건적이 내침하자 공은 총 도원수로 부원수 경천흥 등과 함께 방어에 힘썼으나 마침내 서경이 함락되었다.
공은 이방실 장군과 함께 역습 분전하며 거의 섬멸하니 도강 패주자는 겨우 300명이라 하였다. 공민왕 10년 10월 주원수 파두번 번성 사유관선생 등 홍건적이 10여만의 대군을 이끌고 재침하며 자비령 방책을 무너뜨리고 개경을 함락 시켰다. 공은 서북면 도병마사로서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등과 제장과 힘을 합하여 20만의 정예군으로 개경을 포위 공격하여 적장 사유관선생을 비롯 10여만을 도륙하고 잔적이 압록강을 건너 달아나게 하였다.
서경과 개경전투에는 두 아우 득제 선치와 족제인 운보 신보가 참전했는데 공과 두 아우를 세칭 삼원수라 한다. 이때 통병관 정세 운고 권력을 다투던 참지정사 대역간신 김용이 복주(안동)로 파천해 있던 공민왕을 모시고 있다가 공을 비롯한 여러 장수의 전공을 시기하여 먼저 왕명이라 사칭하며 안우로 하여금 충병관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주장을 죽였다는 죄를 뒤집어 씌워 안우도 죽였다. 공은 문경 산양현으로 피신해 있다가 김용이 보낸 사람에게 잡혀 상주에서 처형되었으니 천추에 남은 원한이다.
공의 문하생인 포은 정몽주 선생이 왕에게 주청하여 시신을 거두고 제문과 만시를 지어 상주 남쪽 10리허에 예장하였는데 묘소는 여조쇠망과 함께 실전되었다. 경기도 파주군 마전에 있는 숭의전과 상주 옥성서원에 배향되었고 공의 6세손 도사공 정필이 경북 금릉군 어모면 여남 내동 갑좌원에 설단하고 충의재(忠毅齋)라 편액하였으며 비를 세웠는데 경술년에 시려 황난선이 비명을 찬하 고 종후손 국원이 쓴 비를 다시 세워 10월 1일 제향하고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병감 조선인명서 한국인 명대사전 저선명신록]
■ 문충공파(文忠公派) 파조(波祖)의 단소 및 재실

■ 문충공파(文忠公派) 파조(波祖)의 행적(行蹟)
▪ 파 조 : 휘(諱) 득배(得培)
▪ 생 몰 : 1312년(충선왕 4, 임자)∼1362년(공민왕 11, 임인)
▪ 가 계 : 상성군(商城君) 김록(金祿)의 장자
▪ 관 직 : 정당문학(政堂文學)
▪ 과 거 : 문과
▪ 군 호 : 상락군(上洛君)
▪ 시 호 : 문충공(文忠公)
▪ 주요행적 :
자(字)는 국자(國滋) 호(號)는 난계(蘭溪)이시다. 어려서 불훤재(不諼齋) 신현(申賢)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330년(충숙왕 17, 경오(庚午))에 19세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과 전개부령(典客副令)
을, 충혜왕(忠惠王) 강릉대군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호종(扈從)하였으며 즉위하기 전에 원나라에서 숙위하였고, 왕이 즉위한 해(1351년) 11월 29일에 우부대언(右副代言)
이 되었으나, 1352년(공민왕 1, 임진(壬辰)) 4월 「안에서 용사(用事)한다」는 찬성사 조일신과 지신사(知申事) 최덕림(崔德林)의 무고로, 좌부대언 유숙(柳淑)과 함께 원나라의 사신에 의해 파면되었다. 이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홍건적의 괴수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이 4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함락하였으며, 부사(副使) 주영세(朱永世) 및 주민 1,000여 명을 살해하였다. 이어 정주(靜州)에서는 도지휘사 김원봉(金元鳳)
을 죽이고 인주(麟州)까지 함락시켰다. 이 때 공은 도지휘사가 되어 서북면도원수 이암(李嵒), 부원수 경복흥(慶復興)과 더불어 적에 대비하고,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분전하여 서경을 탈환하고 압록강 밖으로 적을 격퇴시켰다.
1357년(공민왕 6, 정유(丁酉)) 8월 15일에 서북면홍두왜적방어도지휘사(西北面紅頭倭賊防禦都指揮使)로 임명되었고,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에 재 배정되었으며, 11월 20일에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겸 서경윤(西京尹) · 상만호(上萬戶)가 되었다. 1358년(공민왕 7)에는 추밀원직학사로서, 서경군민만호부만호(西京軍民萬戶府萬戶)로 임명된 경천흥(慶千興)의 부장이 되었다. 1359년(공민왕 8) 정월 29일에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가 되었으며, 기철(奇轍) 일파가 제거된 뒤인 6월에 공이 2등으로 책록 되었다.
8월 3일에 손등(孫登) · 김희조(金希祖) · 정휘(鄭暉) 등과 함께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가 되었다. 12월 11일에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 1360년(공민왕 9) 1월 18일에 여러 장수들이 이끄는 군사들이 생양역(生陽驛)에 모여 그 수가 2만에 달했으나, 겨울이라 사졸들이 동상에 걸리고 길에서 쓰러지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고려사) 또한 홍건적은 고려군이 장차 싸우러 올 것을 알고 포로로 잡았던 고려 백성 1만여 명을 죽였고, 고려군이 서경(西京)을 공격할 때에도 선두에서 진입하던 보병들이 서로 몸이 끼고 쓰러져 짓밟혀서 죽은 자가 1천 남짓에 적의 죽은 자도 수천을 헤아렸다고 한다. 용강(龍岡) · 함종(咸從)으로 밀려난 홍건적의 일부는 의주로 가려다 공격을 당해 정주성으로 가고, 함종에서는 고려군측의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 · 장군 이견(李堅)이 죽는 등의 피해를 겪는 등 고려군과 홍건적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목책에 들어가 방어하는 적들을 향해 고려의 보병이 목책으로 들어가 공격하고, 기병은 목책을 에워싸고 활을 쏘아서, 목책을 지키던 홍건적은 2만여 남짓이 죽었으며 수괴 두 사람이 사로잡혔다. 홍건적은 증산현(甑山縣)으로 물러나 다시 연주강(延州江)을 건너려다 얼음이 갈라져서 천여 명이 빠져 죽었고, 안주에서 철주에 이르는 길에 죽은 홍건적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한다. 옛 선주(宣州)까지 추격한 이방실의 경기병의 공격에 다시 수백 명이 죽고, 의주에 도착해 강을 건너간 홍건적은 3백여 명 남짓이었다(《고려사》). 3월 1일, 경천흥(慶千興) · 안우 등과 함께 승첩(勝捷)을 고하였다. 이 공으로 김득배는 수충보절정원공신(輸忠保節定遠功臣)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에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한방언과 함께 문과를 주관급제자를 뽑았는데 정몽주(鄭夢周)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그러나 홍건적은 1361년(공민왕 10) 겨울에 다시 20만의 무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朔州) · 이성(泥城) 등지를 약탈했고, 김득배는 도병마사(都兵馬使)로서 안우 등과 함께 절령책(岊嶺柵)에서 홍건적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홍건적의 1만여 명이 절령 목책을 공격해 고려군은 크게 패했고, 목책이 무너져 말 한 필로 도망쳐 돌아와야 했다. 이듬해인 1362년(공민왕 11) 1월에 총병관 정세운과 김용 이하 안우, 이방실, 최영(崔瑩)
, 이성계 등이 지휘하는 20만 명의 고려군이 동쪽 교외에 진을 치고 개경을 포위하여, 홍건적을 물리치고 개경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홍건적의 난에서 정세운(鄭世雲)과 같은 총병관(摠兵官)이었던 평장사 김용(金鏞)은 평소 정세운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고, 안우ㆍ이방실ㆍ김득배 등이 큰 공을 이루어 왕의 신임이 두터워질까 두려워서, 안우 등에게 정세운을 죽이게 하고, 왕에게 참소하여 그들에게 죄를 씌워 모두 죽이려 하였다. 이에 왕의 교지를 위조하여 글을 써서, 자신의 조카인 전 공부상서 김림(金琳)을 시켜 몰래 안우 등에게 주면서 「정세운은 본래 경들을 싫어했으니 적을 물리친 뒤에는 반드시 그대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인데 어째서 먼저 그를 죽이지 않는가?」라며 부추겼다.
안우와 이방실은 김득배의 장막에 나아가 「지금 정세운이 적을 두려워하여 진군하지 않고 있으며, 김용이 전하는 글이 이와 같으니, 이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설득했는데, 김득배가 말하기를, 「이제 겨우 도적을 평정했는데 우리끼리 스스로 해칠 수 있는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 그를 대궐의 뜰 앞에 잡아다 놓고 왕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은 각자의 영(營)으로 물러났다가 밤중에 다시 김득배를 찾아와 「정세운을 죽이라는 것은 왕명이다. 우리가 공을 이루고도 왕명을 받들지 않아서 후환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며 김득배를 설득했지만 김득배는 굳이 반대하였다고 한다. 안우 등은 기어코 행하려 하였다. 술자리를 차리고 사람을 시켜 정세운을 초청하고, 정세운이 도착하자 안우 등이 장사(壯士)들에게 눈짓하여 좌중에서 때려죽였다.
정세운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김용은 곧 김유(金庾)·박춘(朴椿)·정지상(鄭之祥) 등을 각지로 보내 안우와 이방실, 김득배를 제거하게 했다. 김득배는 기주(基州)에서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몇 기(騎)를 거느린 채 달아나 산양현(山陽縣)의 선영(先塋)에 숨었다.
이에 김득배의 동생 김득제(金得齊)가 화산(花山)에 유배되고, 득배의 처자가 옥에 갇혀 문초를 받았다. 이때 김득배의 사위였던 직강(直講) 조운흘(趙云仡)이 장모에게 「사실대로 말하셔서 고초를 겪지 마십시오」라고 설득하여, 장모는 한참을 참고 견디다 끝내 사실대로 고하고 말았고, 김유(金庾)·박춘(朴椿)·정지상(鄭之祥) 등에 의해 붙잡혀 3월 1일에 상주에서 효수되었다. 그때 향년 51세였다. 효수된 그의 목을 보며 탄식하고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얼마 뒤 제자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는 왕에게 청하여 시신을 거두고 제문(祭文)과 만시(輓詩)를 지어 상주 남쪽 10리쯤에 예장하였는데 묘소는 전하지 않아 6대손 도사(都事) 김정필(金丁畢)이 김천시 어모면(禦侮面) 여남(汝南) 내동(內洞) 갑좌(甲坐)에 제단을 만들었다. 비문은 시려(是廬) 황란선(黃蘭善)이 짓고 종후손(從後孫) 진사(進士) 김숙원(金肅源)이 썼으며 유허비명(遺墟碑銘)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정종로(鄭宗魯)가 짓고 익위(翊衛) 류심춘(柳尋春)이 썼다.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미산면(嵋山(面) 숭의전로(崇義殿路)에 있는 숭의전(崇義殿)과 상주시(尙州市) 옥성서원(玉城書院)에 파주(坡州) 고려대전(高麗大殿)에 배향 되었으며, 상주 낙양동(洛陽洞)에 유허비가 있다.
배위 군부인(郡夫人) 서흥김씨(瑞興金氏)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세구(金世丘)의 여식이고, 서흥군(瑞興郡), 김천록(金天祿)의 손녀이며, 정용장군(精勇將軍) 김덕인(金德仁)의 증손녀이고, 밀직사사(密直司事) 성주인(星州人) 이백년(李百年)의 외손녀이시다. 생몰은 전하지 않으며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神勒寺普濟尊者石鐘碑)에 기록이 전하며, 슬하에 5녀를 두셨으니 장녀는 정윤윤(鄭允玧)에게 시집갔고, 다음 찬성사(贊成事) 여산인(礪山人) 송상(宋祥)의 아들인 송천(蒨宋)에게 시집갔으며, 다음 어사(御使) 풍양인(豐壤人) 조호(趙虎)의 아들인 정당문학(政堂文學) 조운흘(趙云仡)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재신(宰臣) 강릉인(江陵人) 김원봉(金元鳳)의 아들인 중추(中樞) 김영화(金永和)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목사(牧使) 진주인(晉州人) 류손(柳巽)의 아들인 재신(宰臣) 류휘종(柳暉宗)에게 시집갔다.
이후 아우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의 넷째 아들인 전서공(典書公) 김승귀(金承貴)를 계자(系子)하여 뒤를 이었다.
○ 용궁에 한거할 때 난계 김득배가 시를 보내 왔으므로 그 시를 차운하여[龍宮閑居金
蘭溪 得培寄詩次其韻] - 전원발(全元發)
江闊脩鱗縱 강물이 넓으니 물고기가 자유롭고
林深倦鳥歸 숲이 깊으니 지친 새가 돌아온다.
歸田是吾志 전원에 돌아옴만이 나의 뜻이요.
非是早知幾 부귀의 위태로운 기미를 일찍 안 건 아니어라.
▢ 경사문(經史門) 성호사설(星湖僿說) 이익(李瀷) 김득배(金得培)
우리나라의 유학(儒學)은 정포은(鄭圃隱)에서 시작되었는데, 포은은 고려 원수(高麗元帥) 김득배(金得培)의 문인이었다. 김득배는 정세운(鄭世雲)·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과 더불어 홍두적(紅頭賊)을 평정시켰다.
그때 김용(金墉)이 정세운을 죽이려고 교조(矯詔)를 세 사람에게 내려 주면서 정세운을 죽이도록 하였다. 안우와 이방실은 김득배와 동모하려 했으나 김득배는 따르지 않았다. 결국 안우와 이방실만이 정세운을 죽였는데, 김용은 또 정세운을 죽인 죄를 이 세 사람에게로 덮어씌워서 모조리 죽이자, 김득배의 문인 정모(鄭某 정포은(鄭圃隱)을 이름)가 그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는 것이다.
김득배는 비록 원수가 되었으나 문과 출신(文科出身)으로 안우와 이방실의 모의에 따르지 않았으니 몸가짐을 곧게 하여 그대로 실천한 것이고, 평생을 저버리지 않은 정포은 같은 문생을 두었으니 교수(敎授) 역시 제대로 한 사람이다.
문(文)은 능히 몸을 빛나게 했고 무(武)는 능히 공훈을 세웠으니, 그의 위인을 짐작할 수 있다. 나중에 포은의 훌륭한 수립(樹立)만 보아도 어찌 주고받은 연원(淵源)이 아니겠는가?
포은은 안으로는 습명(襲明)의 유열(遺烈)이 있고 밖으로는 김득배의 배양(培養)이 있었으니,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한 것도 또한 어찌 알맞지 않은가?
지금 사람은 문충만 높일 줄 알고 김득배가 있었던 것은 모르므로 이를 밝혀 두는 바이다.
▢ 고려 정당문학 문충공 난계 상산 김공 휘 김득배(金得培) 제단비명
高麗政堂文學 文忠公蘭溪商山金公諱得培祭壇碑銘 幷序
禮去祧爲壇無墓而壇非古也然而寓慕無地有爲壇而祭者不害爲追遠而歸於厚也蓋祖考之氣則子孫之氣以一氣而積感應之誠則神於是乎在矣將何地而不可祭乎日金斯文仁植周植上舍昌植屬余以告曰先祖蘭溪先生卽勝國忠賢也商山誌載墓在州南十里云而累經兵燹점(말잘할짐言+利)卜無徵六世孫都事公就其所居金山郡汝南內洞設壇而歲祀者行將數百年矣乃者擬欲麗牲于其側玆以麗史本傳及家傳舊蹟敢請顯刻之辭余以無位與文再三辭不獲則遂按而叙之曰先生諱得培字國滋號蘭溪商山之金出系新羅敬順王以高麗甫尹諱需爲始祖至諱鎰官贊成事封上洛君諱祿官門下侍中封商城君先生祖若考也妣延昌郡夫人朴氏大盈署令瑛女先生以 忠宣王壬子生早歲而孤廬墓三年與二弟得齊先致事母篤孝杜門劬學十九登文科官藝文館檢閱典客副令右副代言政堂文學樞密院直學士西北面都指揮使時紅巾賊亂國中先生以白面書生首倡大義與李芳實安祐二帥掃蕩狂 塵國賴以安授西京尹上萬戶賜輸忠保節定遠功臣號封上洛君圖形壁上有奸臣金鏞忌諸有功者矯密旨殺摠兵官鄭世雲而先生害之乃 恭愍王壬子享年五十一圃隱鄭先生以先生門人收屍以葬祭以文曰使泰山之公爲鋒刃之血吾知忠魂毅魄飮泣於泉下此可以認先生之寃也我 太祖追諡文忠配麻田郡崇義殿愚蒼諸先生又俎豆於尙之玉城院其奉安文祠堂記先生之精忠偉烈揄揚盡矣後人烏敢加一辭也配瑞興郡夫人金氏版圖判書世丘女不育男以弟洛城君先致第四子典書承貴爲嗣五女鄭允珍知郡宋蒨文學趙云仡知樞金永和冢宰柳暉宗典書子尙溫吏曹判書子壽永縣令二子漢碩參奉漢佐無官參奉二子琥展力副尉瓛訓導副尉二子丁畢都事卽設壇者也丁角無官都事四子宏察訪容寺正宇參奉安翰林察訪子晉兌啓功郞寺正二子晉秋進士晉勵縣監餘不錄銘曰 猗歟先生孝且忠用文而起振武功英風肅肅薄東海魏勳盛烈反罹凶圃翁一誄徹壤穹塵沙過刦失其封昆仍愴是壇築崇縱非榟鄕孫枝穠洋洋如水神氣通于以血祀垂無窮靑山回首白雲空志士千載尙餘恫
上之三十一年甲午十二月 日
後學長水黃蘭善謹撰
從後孫進士肅源謹書
▢ 고려 정당문학 문충공 난계 상산김공 휘 득배 제단비명 병서 (高麗政堂文學文忠公蘭溪商山金公諱得培祭壇碑銘幷序)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사당을 떠나면 단(壇)을 만든다.
”라고 하였으니 묘소가 없어서 단을 만드는 것은 예전에는 있지 않았다. 그러나 사모하는 마음을 붙일 곳이 없어 단을 만들어 제사를 올리는 것은 먼 조상을 생각함에 있어 해가 되질 않고 덕이 후한 대로 돌아갈 것이다. 이는 조상의 기운은 곧 자손의 기운이므로 한 기운을 가지고 감응의 정성을 쌓는다면 신께서 여기에 있을 것이니, 장자 어느 곳에서든 제사를 올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루는 김 사문(斯文) 인식(仁植)과 주식(周植) 그리고 진사(進士) 창식(昌植)이 나에게 부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우리 선조이신 난계선생께서는 고려시대의 충현(忠賢)이십니다. 『상산지(商山誌)』에는 묘소가 상주 남쪽 10리에 있다고 되어 있으나 여러번 병화를 겪은 탓에 그 위치를 징험할 수 없어 공의 6대손인 도사공(都事公)께서 곧 그가 거주하던 곳, 금산군(金山郡) 여남내동(汝南內洞)에 단을 만들고 해마다 제사를 올린지가 거의 수백년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그 제단 곁에 비석을 세우고자, 여기『고려사』와 집에 전하는 옛 문적들을 가지고 감히 비석에 새길 글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지위도 없고 글을 못한다며 여러번 사양하였으나 되질 않아, 마침내 살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선생의 휘는 득배(得培)이며 자는 국자(國滋)이고 호는 난계(蘭溪)이다. 상산김씨는 계통이 신라시대 경순왕(敬順王)에서 나왔으며, 고려시대 보윤(甫尹) 휘 수(需)를 시조로 삼는다. 휘 일(鎰)에 이르러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이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휘 록(祿)은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상성군(商城君)에 봉해지니, 선생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이다. 어머니 연창군부인(延昌郡夫人) 박씨는 대영서 령(大盈署令) 영(瑛)의 여식이다. 선생은 충선왕(忠宣王) 임자년(1312)에 출생하였는데 어린나이에 아버지를 여위게 되어 3년 동안 여묘(廬墓)하였고, 두 아우 득제(得齊)·선치(先致)와 함께 어머니를 섬기되 효행이 돈독하였다. 문을 닫고 학업에 힘써 19세 때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은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과 전객부령(典客副令)·우부대언(右副代言)·정당문학(政堂文學)·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에 올랐다. 당시 홍건적이 나라를 어지럽힐 때에 선생은 백면서생으로써 가장 먼저 대의(大義)를 부르짖으며 이방실(李芳實)·안우(安祐) 두 장수와 함께 적을 소탕하니 나라가 이로 인해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이 전공으로 서경윤(西京尹)과 상만호(上萬戶)가 제수되고, 수충보절 정원공신호(輸忠保節定遠功臣號)가 내려지며,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지고 벽상(壁上)에 형상이 그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간신 김용(金鏞)이 공로가 있는 여러 사람들을 시기하여 군명을 사칭한 밀지를 내려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죽이고 선생을 해하였으니, 바로 공민왕 임자년(1372)이며 향년 51세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은 선생의 문인(門人)으로 시신을 거두어 장사지내고 제문(祭文)을 지어 제를 올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태산과 같은 공을 세우고도 칼날에 죽임을 당하였으니 충성된 혼과 거룩한 넋이 구천아래에서 눈물을 삼킬 것을 나는 아노라.’고 하였으니 이 글에서 선생의 원통함을 알 수 있다. 우리 태조(太祖)께서는 시호를 추증하고 마전군(麻田郡)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게 하였으며,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선생도 또한 상주 옥성서원(玉城書院)에 봉향하고, 그 봉안문(奉安文)과 사당기(祠堂記)에서 선생의 한결같은 충성과 위대한 공로를 모두 찬양하였으니 어찌 감히 더할 말이 있겠는가.
배위 서흥군부인(瑞興郡夫人) 김씨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세구(世丘)의 여식인데 아들을 두지 못하여 아우 낙성군(洛城君) 선치(先致)의 5남 전서(典書) 승귀(承貴)로 후사를 삼았다. 사위는 다섯인데 정윤진(鄭允珍), 지군(知郡) 송천(宋蒨), 문학(文學) 조운흘(趙云仡), 지추(知樞) 김영화(金永和) 총재(冢宰) 유휘종(柳暉宗)이다. 전서의 아들 상온(尙溫)은 이조판서(吏曹判書)이고, 판서의 아들 수영(壽永)는 현령(縣令)이며 2남을 두었으니 한석(漢碩)은 참봉(參奉)이고 한좌(漢佐)는 벼슬이 없다. 참봉은 2남을 두었으니 호(琥)는 전력부위(展力副尉)이고 훤(瓛)은 훈도(訓導)이다. 부위는 2남을 두었으니 정필(丁畢)은 도사(都事)인데 바로 단(壇)을 만든 분이며, 정각(丁角)은 벼슬이 없다. 도사는 4남을 두었으니 굉(宏)은 찰방(察訪)이고 용(容)은 시정(寺正)이며 우(宇)는 참봉(參奉)이고 안(安)은 한림(翰林)이다. 찰방의 아들 진태(晉兌)는 계공랑(啓功郞)이다. 시정은 2남을 두었으니 진추(晉秋)는 진사(進士)이고 진려(晉勵)는 현감(縣監)이다. 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이어 다음과 같이 명(銘)하노라.
猗歟先生孝且忠 아! 선생의 효과 충이여
用文而起振武功 문인으로 일어나 전장에서 공을 떨쳤네.
英風肅肅薄東海 뛰어난 기풍은 엄숙히 나라에 알려졌고
魏勳盛烈反罹凶 큰 공훈을 세웠으나 흉계에 걸렸도다.
圃翁一誄徹壤穹 포은이 제문을 지어 장사지냈으나
塵沙過刦失其封 헤아릴 수 없는 재앙으로 묘소를 잃었네.
昆仍愴是壇築崇 자손들이 슬퍼하며 단을 만들어 숭상하니
縱非榟鄕孫枝穠 비록 옛무덤은 아니지만 후손들 많구나.
洋洋如水神氣通 양양히 물 흐르듯 신기가 통하니
于以血祀垂無窮 희생을 올려 제향함이 무궁할 것이네.
靑山回首白雲空 청산을 돌아보니 구름만 떠가고
志士千載尙餘恫 지사들은 오래토록 아픔만 남누나.
고종 31년 갑오(1894) 12월 일에 후학 장수(長水) 황란선(黃蘭善)이 삼가 짓다.
종후손(從後孫) 진사(進士) 숙원(肅源)이 삼가 쓰다.
■ 문충공 고려 충신 정당문학 난계 김득배의 유허비(遺墟碑)

▢ 고려 정당문학 문충공 난계 김선생 유허비명
高麗 政堂文學 謚 文忠公 蘭溪 金先生 遺墟碑銘 幷序
嗚呼。此蘭溪金文忠公諱得培之遺墟也。在尙州西門外洛陽驛前。盖公之弟洛城君諱先致亦同居云。公事高麗恭愍王。官至政堂文學。又爲西北面都廵問使。方紅巾賊之亂。國幾亡。賴公以白面書生。奮義討賊得不亡。其功大矣。不幸有奸臣金鏞忌諸有功者。矯密旨令殺揔兵官鄭世雲於元帥安祐,指揮使李芳實軍中。旋以擅殺論。而謂公與同幷害之。然公實立異而力止之者也。此其事具載麗史及商山誌。圃隱鄭先生又以公門人。請王收屍而祭以文曰。吾知公忠魂壯魄。飮泣於九泉之下。公之寃豈不於此而益可想也耶。用是我聖朝追謚文忠。使配享於麻田郡崇義殿。尙之士又俎豆公於玉成院。而其遺墟亦爲後人之所愛慕。至今四百餘載。尙指點而咨嗟焉。顧公之後微。中間幾不保有。胄孫名龍雨者。與其族克守之。又欲竪短碑以表。未及而龍雨死。今洛城君之裔啓東。亦與之同心。方治石記其事。屬余爲之銘。銘曰。
烈烈惟公文且忠。用儒術起著厥庸。狂寇猝入國幾亡。誓死敵愾摧其釯。白面奮義節尤炳。奸鏞忌功設機穽。嘖彼二帥墮其術。公持不可辭嚴截。奈裒厥耳竟殺雲。事久乃定白黑分。混被其罪寃徹天。圃老一誄公泣泉。聖朝追謚配義殿。偉功異蹟光史傳。士林尸祝報無極。睠玆遺墟宛餘馥。千秋萬歲人不忘。有欲徵之視我章。
通訓大夫前行司憲府掌令晉陽鄭宗魯撰
禦侮將軍行世子翊衛司翊贊豊山柳尋春書
고려 정당문학 문충공 난계 김선생 유허비명 병서
(高麗 政堂文學 謚 文忠公 蘭溪 金先生 遺墟碑銘 幷序)
아! 이곳은 난계(蘭溪) 김 문충공(金文忠公) 휘(諱) 득배(得培)의 유허(遺墟)이니 상주(尙州) 서문 밖 낙양역(洛陽驛) 앞에 위치한다. 공의 아우 낙성군(洛城君) 휘 선치(先致) 또한 함께 거주한 곳이라 한다.
공은 고려 공민왕(恭愍王)을 섬겨 관직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또 서북면(西北面) 도순문사(都廵問使)가 되었을 때 마침 홍건적의 난으로 나라가 거의 망할 지경이었는데, 공이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서 의(義)를 떨쳐 적을 토벌했던 덕에 망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그 공로가 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간신(奸臣) 김용(金鏞)이 당시 공로가 있었던 이들을 시기하여, 밀지(密旨)를 고쳐서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을 원수(元帥) 안우(安祐)지휘사(指揮使) 이방실(李芳實)의 군중에서 죽이게 하고는, 곧 제멋대로 죽인 것이라 논하면서 공이 그들과 함께 정세운을 죽인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공은 실제로는 다른 의견을 내세워 힘써 그들을 저지한 자이니, 이 일은 《고려사(高麗史)》와 《상산지(商山誌)》에 자세히 실려 있다.
포은(圃隱) 정 선생(鄭先生)은 또한 공의 문인으로서 시신을 거두어 제사 지낼 것을 주상에게 청하고, 제문을 짓기를, “나는 공의 충성스럽고 장렬한 혼백(魂魄)이 지하에서 흐느껴 울고 있을 줄 알겠도다.
”라고 하였으니, 공의 원한을 어찌 여기에서 더욱 상상해 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로써 우리 성조(聖朝)에서 문충(文忠)을 추시(追諡)하고, 마전군(麻田郡)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토록 하였다. 상주(尙州) 선비들 또한 옥성서원(玉城書院)
에 공을 제향 하였고, 그 유허는 또한 후인들이 애모(愛慕)하는 곳이 되어 지금껏 4백여 년이 되도록 여전히 손으로 가리키며 찬탄하고 있다.
그러나 공의 후손이 쇠미하여 중간에 거의 보존하지 못하다가 주손(冑孫) 용우(龍雨)가 종족들과 잘 지켜 내었고, 또한 작은 비석을 세워서 드러내고자 하였는데 이를 실행하기도 전에 용우가 세상을 떠나 버렸다.
지금 낙성군(洛城君)의 후손 계동(啓東)
이 또한 그와 뜻을 함께하여, 마침 돌을 마련해서 그 사적을 기록하려 나에게 명을 지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어 다음과 같이 명(銘)하노라.
烈烈惟公文且忠 열렬하도다 공은 문재 있고 또 충성스러웠으니
用儒術起著厥庸 유술로 일어나 그 공적 드러내었네
狂寇猝入國幾亡 광란한 도적 난입하여 나라가 거의 망할 뻔하자
誓死敵愾摧其釯 죽음 맹세하고 적개심 품고서 적의 칼날 꺾었네
白面奮義節尤炳 백면서생으로 의를 떨쳐 그 절의 더욱 빛났는데
奸鏞忌功設機穽 간신 김용이 그 공적을 시기하여 모함하였네
嘖彼二帥墮其術 저 두 장수가 그 술수에 빠져드는 것을 꾸짖으니
公持不可辭嚴截 공이 불가함을 견지한 그 말 엄절하였네
奈裒厥耳竟殺雲 어찌 그 귀를 막고서
결국 정세운을 죽였던가
事久乃定白黑分 일이 오랜 뒤에야 밝혀져 흑백이 분명해 졌네
混被其罪寃徹天 죄를 온통 뒤집어써 원통함이 하늘에 닿으니
圃老一誄公泣泉 포은의 제문에서 공이 황천에서 흐느낀다 하였네
聖朝追諡配義殿 성조에서 추시하고 숭의전에 배향하니
偉功異蹟光史傳 위대하고 뛰어난 공적이 역사서에 빛나네
士林尸祝報無極 사림들이 제향하여 끝없이 보답하니
睠玆遺墟宛餘馥 이 유허를 돌아봄에 완연한 향기 남아 있네
千秋萬歲人不忘 천추 만세토록 사람들이 잊지 않으리니
有欲徵之視我章 이를 징험해 보려거든 나의 글을 보시라
통훈대부(通訓大夫) 전 행 사헌부(前行司憲府) 장령(掌令) 진양(晉陽) 정종로(鄭宗魯)
가 글을 짓다.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세자익위사(行世子翊衛司) 익찬(翊贊) 풍산(豊山) 유심춘(柳尋春)
이 글씨를 쓰다.
숭정기원후 3(崇禎紀元後 3) 신미(1811 辛未) 3월 일
檀紀四三一一年(1978년) 무오(戊午) 三月(3월) 日
수종의개수(收宗議改竪) 김령(金寜) 김인규(金仁圭) 書
【參考文獻】 : 진양(晉陽) 정종로(鄭宗魯) 입재집(立齋集) 제33권
■ 문충공 난계 김선생 충혼 장백비(忠魂 壯魄碑)
○ 2020년 6월 일
경북대학교 명예교수 권태을(權泰乙) 謹撰, 상주시장 강영석(姜永錫) 謹竪.
▢ 문충공 난계 김선생 충혼 장백비(圃隱 鄭夢周 先生의 祭文)
祭 金元帥 得培 文
嗚呼皇天。此何人哉。蓋聞福善禍淫者天也。賞善罰惡者人也。天人雖殊。其理則一。古人有言曰。天定勝人。人衆勝天。亦何理也。往者紅寇闌入。乘輿播越。國家之命。危如懸綫。惟公首倡大義。遠近嚮應。身出萬死之計。克復三韓之業。凡今之人。食於斯寢於斯。伊誰之功歟。雖有其罪。以功掩之可也。罪重於功。必使歸服其罪。然後誅之可也。奈何汗馬未乾。凱歌未罷。遂使泰山之功。轉爲鋒刃之血歟。此吾所以泣血而問於天者也。吾知其忠魂壯魄。千秋萬歲。必飮泣於九泉之下。嗚呼命也。如之何如之何。
1362年 3月
圃隱 鄭夢周 謹撰
祭 金元帥 得培 文 [김득배에게 드리는 제문]
아, 슬프다.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일인가. 대개 들으니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음(淫)한 이에게 화(禍)를 주는 것은 하늘이며, 착한 이에게 상을 주고 악한 이에게 벌을 주는 것은 사람이라고 하니,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그 이치는 같도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이 그 이치가 정해지면 사람한테 이기고, 사람이 많으면 하늘한테 이긴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옛날에 홍구(紅寇)가 짓밟고 들어올 때, 임금의 수레가 멀리 피난갔으니 국가의 명(命)이 위태함이 실끝 같았는데, 오직 공이 대의(大義)를 수창(首唱)하였으므로 원근이 메아리처럼 응하였다. 몸소 일만 번이나 죽을 꾀를 내어서 능히 삼한(三韓)의 업(業)을 회복하였으니,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누구의 공인가. 비록 그 죄가 있다 하더라도 공(功)으로써 죄를 감하는 것이 옳고, 만일 죄가 공보다 무겁다면 반드시 돌아와 죄에 자복하게 한 연후에 죽이는 것이 옳은데, 어찌하여 말[馬]에 땀이 마르지 아니하고 개가(凱歌)를 마치기도 전에 태산 같은 공을 도로 칼날의 피로 만드는고. 이것을 내가 피맺히게 하늘에 묻는 바이다.
나는 안다. 그 충혼과 장백(壯魄)이 천추만대에 반드시 구천 아래에서 울고 있을 것이다.
아, 슬프다. 명이구나. 어찌할꼬. 어찌할꼬.
1362年 3月 日
포은 정몽주 삼가짓다.
▢ 만시(輓詩)
김원수 득배를 제사하다(祭金元帥 得培) - 圃隱 鄭夢周 撰
自是書生合討文 본래 서생이라 응당 글을 논해야 하거늘
柰何麾羽將三軍 어찌하여 깃발 휘둘러 삼군을 거느렸나
忠魂壯魄今安在 충직하고 씩씩한 혼백 지금 어디 계시나
回首靑山空白雲 푸른 산 돌아보니 흰 구름만 둥실 떠 있네
▢ 제김해객사(題金海客舍) - 김득배(金得培)
來管盆城二十春 이 분성에 와서 관기 노릇한 지 스무 해 전이라
當時父老半成塵 그 당시의 부로들은 반이나 티끌 되었네
自從書記爲元帥 서기(管記)로부터 원수 된 이 보나니
屈指如今有幾人 지금 세상에 손가락 꼽아 몇 사람이 되는가
▢ 세 원수(元帥)
를 조상하며 이행(李荇)
憤有異世猶不洩 시대가 달라졌어도 분노는 외려 아니 풀려
故余心之激烈 그래서 나의 마음이 격렬해지누나
何三帥之無辜 어찌하여 아무 죄 없는 세 원수가
羌遭此之慘酷 이토록 참혹한 화를 당했단 말인가
紅寇狺然而內噬 홍건적이 으르렁거리며 침입해서
恣魚肉乎生民 우리 백성들 마구 학살할 때
神州擧爲陸沈 이 나라 강토가 적에게 유린되었고
乘輿蕩而蒙塵 임금의 행차 허둥지둥 몽진하였지
倘非諸將之協力 만약 여러 장수들이 협력하지 않았다면
疇克收復乎王京 뉘라서 도성을 수복할 수 있었으리요
捷書纔報於行宮 승첩이 겨우 행궁에서 보고되자마자
奄奇禍之橫生 문득 뜻하지 않은 화가 발생하였구나
尸三勳於一朝 하루아침에 세 공신을 죽였으니
甚矣恭愍之昏庸 심하도다 공민왕의 어리석음이여
忌功害能 남의 공로나 능력을 시기하는 건
小人之常態 소인들이 항상 하는 작태이니
吾又何誅乎金鏞 내 어찌 저 김용을 탓할 것인가
信讒賊而讐忠 교활한 역적의 말 믿고 충신 죽였으니
宜夫王之不終 당연하도다 왕 노릇 마치지 못한 것이
嗚呼 오호라
究厲階之所由 그 재앙의 발단을 궁구해 보면
亦諸君之自取也 또한 이분들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
建制勝之大策 큰 계책을 세워서 승리를 거둔 것
始誰爲之主也 애초에 그 누구가 주도했던가
彼矯書之有以 거짓 조서 꾸민 건 까닭이 있었건만
胡不悟之早也 어이하여 일찍이 깨닫지 못했던고
殺總兵而莫之疑兮 총병을 죽이고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固反爾之道也 진실로 반이의 도라
하겠도다
雖然 비록 그렇지만
事有所至難者矣 당시의 처사는 지극히 어려운 점 있었으니
大功旣成 큰 공을 이미 이루매
重兵在握 무거운 병권(兵權)이 손아귀에 있었으니
請之則爲專制之臣 이의를 제기하면 전횡하는 신하가 되고
從之則爲一網之肉 따르면 일망타진 죽임을 당할 게 뻔했어라
嗟哉諸君 아아 이분들은
罹此惟谷 이러한 진퇴유곡에 빠졌어라
已矣乎 그만이로다
使泰山之功 태산같이 큰 공으로 하여금
轉爲鋒刃之血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했다는
深有悼於鄭文忠之文 정 문충공
의 제문에 깊이 애도하노라
忠魂壯魄之安在 충성스럽고 씩씩한 혼백은 어디 있느뇨
但靑山之白雲 청산에는 흰 구름만 떠 있을 뿐이로다
■ 고려 정당문학 문충공 난계 김득배 선생 생거지 비(生居地 碑)

▢ 高麗 政堂文學 金得培 先生 生居地 碑
- 碑 文 -
人傑은 地靈이라. 이곳은 俗離山 葛嶺芍藥地脈 遯達山 동쪽 끝자락, 潁江水 굽이돌아 明堂을 이룬 곳 깃골(箕谷, 龜谷)이라 이르니 七百年前 高麗忠臣 金得培將軍이 태어나시고 成長하신 世居地로다.
先生의 號는 蘭溪이며 字는 國滋, 諡號는 文忠이니 商山金氏의 始祖 甫尹公 諱 需의 11世孫으로 文忠公派의 派祖가 되는 분이시다.
祖父는 上洛君 鎰이며 祖母는 金萬宮이다.
고려 충선왕 4년(1312) 壬子에 아버지 商城君 祿과 어머니 竹山朴氏 사이에 得培 得齊 先致 3형제 중 맏이로 태어나 配位는 瑞興金氏이며 슬하에 女息 다섯을 두었다. 이 마을에서 득배 3형제가 자라났다는 사실이 밝혀진 일은 영조 38년 이 마을 李延元의 집 우물에서 先致가 학동시절 사용하던 벼루가 수습되고 부터다.
先生은 약관 1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典客副令으로 江陵大君 入元時 10년간 扈從 宿衛하였으며 1351년 강릉대군이 恭愍王에 즉위하자 右副代言이 되었으나 反元政治改革에 부담을 느낀 權臣 趙日新의 誣告로 낙향한 후 깃골에서 4년을 지내면서 儒賢들과 교유하고 개혁의 의지를 다지던 중 수차 공민왕의 부름을 받아 樞密院 直學士에 오르고 西北面 都巡問使 上萬戶가 되었다.
공민왕 8년 12월 4만여 紅巾賊이 來侵하자 都元帥의 命을 받고 방어 했으나 衆寡不敵으로 서경이 함락돼 공민왕 9년 安祐 李芳實 등 諸將과 協謀하여 적을 전멸시키고 서경.함종을 탈환하니 王은 輸忠保節定遠功臣을 賜하고 政堂文學을 除授하였다. 同年 10월에 知貢擧가 되어 鄭夢周 林樸 文益漸 등 33인을 급제시켰다. 공민왕 10년 10월 紅巾賊 20萬 大軍이 再侵함에 都兵馬使가 되어 안우 이방실과 이를 방어 했으나 개경이 함락되어 국토가 초토화되고 고려사직이 存亡의 위기에 처하니 공민왕이 福州(安東)까지 蒙塵하고 尙州에 머물면서 聞慶 主屹山에 피신하였다.
先生은 공민왕 11년 정세운, 안우, 이방실과 최영, 이성계 등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出征하여 紅巾賊을 완전 소탕하여 亂을 平定하였다.
두 아우 商山君 得齊, 洛城君 先致도 뛰어난 將軍으로 개경 탈환전에 참전하여 國家危亡之際에 首倡大義하사 克復 救國之業하시니 世稱 3元帥라! 靑史에 빛나도다. 先生은 智略이 특출한 文武兼全 儒將으로 奮戰討賊 하였으니 그 공이 至大함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영원불변 하오리다.
이때 總兵官 鄭世雲과 勢力을 다투던 평장사 金鏞이 有功者들을 시기하여 王의 密旨라고 거짓 조서를 꾸며 안우와 이방실로 하여금 總兵官을 살해케 하였으니 안우와 이방실은 金得培를 끌어 들이려 하였으나 단호하게 반대하고 만류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조서를 믿고 總兵官을 유인하여 壯士를 시켜 打殺 하였다.
金鏞은 안우와 이방실이 主將을 살해 했다고 王에게 告해 안우와 이방실을 타살케 한 다음 金得培를 살려두면 거짓이 탄로 날까 두려워 同類로 누명을 씌워 체포케하니 下手人 鄭之祥 등에 의해 영순면 遠湖洞 先代의 墓幕에 피신했다가 압송돼 상주 屛城에서 謀殺되니 千秋萬古에 怨恨이라.
歲壽 51세 공민왕 11년(1362) 3월 1일 큰 별 지다.
先生의 門人 포은 정몽주는 공민왕에게 奏請하고 屍身을 殮襲하여 상주 남쪽 十里許에 안장하고 祭文과 挽詩를 지어 장사지냈다. 포은이 靈前에 바친 祭文은 可謂 字字血淚로서 어찌하여 말머리에 땀도 마르기 전에 태산같은 공로가 있는 사람을 피로 칼날을 적시게 하였는가? 忠魂壯魄이 九泉地下에서 피눈물을 마실 것이라 하였으며 師門의 殉道的 죽음은 조선조 500년을 回通하는 충절의 피를 선죽교에 뿌리는 母胎가 되었다. 그 후 金鏞의 奸計가 탄로나 公의 無辜함이 밝혀졌음에도 先王의 허물이라 미뤄오다가 王系가 바뀐 공양왕에 이르러 上洛君에 封君되고 伸寃이 되었으며 조선조 세종연간에 梁誠之의 상소로 문무겸전의 극칭인 文忠의 諡號가 내려지고 국란극복 16功臣으로 崇義殿에 배향되었다.
公의 天壽가 꺾이지 않았던들 고려의 國運과 歷史는 바뀌었을 것이니 아- 애석하고 원통하다! 賊亂焚蕩 속 누명까지 쓰고 자취 묻혔으니 이 碑 건립으로 그 偉業 올바로 인식되고 再 照明되는 계기가 되어 公께서 다시 한 번 이 세상에 태어나는 불씨가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公은 紅巾賊 침입으로 나라의 존망이 風前燈火같은 危亡之際에 奮戰討賊救國하사 그 偉業과 忠魂을 높이 받들고 顯彰해야할 역사적인 인물로서 국가적 차원으로 민족정신 교육의 龜鑑이라 聞慶市의 後援으로 聞慶人의 뜻을 모아 이 碑를 세운다.
二○一七 丁酉 十月 二○日 建立
鄕土史家 李昌根 謹撰
深耕 黃圭郁 謹書
高麗 政堂文學 金得培先生 生居地碑 建立委員會 謹竪
▢ 高麗忠臣 金得培 先生 生居地碑 建立記 詩
李 昌 根
先生與我豈緣親 (선생여아기연친) 선생과 나 어찌하여 연을 맺어
晝夜戀情無禁眞 (주야연정무금진) 밤낮으로 애절한 통한의 심사 금할 길 없네.
知得於焉當七歲 (지득어언당칠세) 이일 알고 지난 지 칠년 세월 되었는데
易難結解歷多晨 (이난결해역다신) 쉬울 듯 어렵고 맺고 헤어짐이 오래 되었네.
屍身負背彷徨夢 (시신부배방황몽) 시신을 등에 업고 나온 꿈은
方此皇天啓示因 (방차황천계시인) 바야흐로 이것이 하느님의 계시일세.
世事不難何莫在 (세사불난하막재) 세상사 어렵지 않은 일 없다지만
疲吾忍耐氣渾淪 (피오인내기혼륜) 지친 나 참고 견디기엔 기운이 다빠져 버렸네.
目前完決感知際 (목전완결감지제) 완결이 목전에 와 있음을 느끼는데
意氣消沈怨望申 (의기소침원망신) 의기 소침하여 원망만 거듭될 뿐이네.
靑史長傳斯偉業 (청사장전사위업) 청사에 기리 남을 이 위업을
衰吾豈但獨任陣 (쇠오기단독임진) 나약한 나에게 어찌 홀로 맡겨 두는고.
乖違甚誤恨嘆發 (괴위심오한탄발) 잘못되어도 너무 잘못되어 한탄만 나오는 데
此不官廳擔任伸 (차불관청담임신) 이런 일은 관청에서 맡아서 해야 될 일이 아닌가.
丕績何誰初案者 (비적하수초안자) 큰 업적 어느 누구가 초안자 인가
姓名永剩但望人 (성명영잉단망인) 이름 석자 기리 남기를 다만 바랄 뿐이네.
麗端燈火甚危際 (여단등화심위제) 고려 말 풍전등화 같은 나라가 위태로울 때에
救國陋名寃魄巡 (구국누명원백순) 나라를 구하였는데도 누명을 써 원혼이 떠다니는데
盍識忠信渾族摠 (합식충신혼족총) 이러한 충신을 온 민족이 다 어찌 알지 못하는 고
昌根惟獨實行臻 (창근유독실행진) 창근이 오직 홀로 실행에 옮길 따름일세.
<獻 詩>
▢ 충혼(忠魂)의 꽃으로 피었노라
月夕 姜 相 律
- 난계(蘭溪) 김득배(金得培) 장군 생거지 비 제막식 기념에 부쳐 -
역사의 이끼에 가려진
난세 속에 어둠을 뚫고 밀어낸
존망의 위기에 처한 국난을 평정하여
고려 사직을 구한 장군은
청사에 빛나는 한 시대의 영웅이었습니다.
굴절된 바람의 흔적마다
위기를 극복한 불세출의 명장으로
모함을 딛고 사직 공신에 재조명 됨은
충혼장백의 숭고한 위업을 역사에 새긴
그 빛의 이름이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목마른 산천을 품은 땅 끝까지
격변의 그림자 머문 터전 위에서
새 천년 횃불 밝혀 불씨를 피웠던
불멸을 향한 전설 속 붉은 깃발을 달고
천하를 호령하던 장군의 외침이 가까이 들려옵니다.
문경 깃골에 서린 장군의 기백은
이 땅에 뿌리 내린 불기둥 되어
주흘산 높은 기상되고
영강물 깊은 흐름 되어
우리들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쉬나니
마지막 꿈에서 깨어나
밀알이 썩어 새 열매를 맺는
우국충정 깃든 영혼의 길목에
의연히 일어서 하는 우러러 헤아려보는
광야에 핀 충혼 거룩한 숨결의 넋이어라
바람 가는 길을 묻는 숨겨진 자리에
명예회복을 위한 운명적 만남을 이룬
절개 높은 의로운 포은의 충절을 익힌
향토사가 이창근 선생의 숨은 헌신으로
소리 없이 벙항 햇던 역사의 진실을 찾아
어둠 속 슬기로운 햇살 솟구친
꺼지지 않는 장군의 시대정신은
핏빛 함성이 밝게 빛나는 별빛을 안고
새 하늘 여는 역사의 꽃으로 다시 피었노라
호국정신 높게 받드는 충혼의 꽃으로 피었노라.
■ 普濟尊者石鐘碑(보제존자석종비)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는 신륵사에 모셔진 보제존자 나옹(1320~1376)의 석종형 승탑 옆에 세워진 비석이다. 나옹은 선종과 교종을 통합하여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한 승려로, 양주 회암사의 주지로 있다가 왕의 명을 받아 밀양으로 가던 도중 이곳 신륵사에서 입적하였다.
이후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절 안에 터를 마련하여 사리를 모신 석종을 세웠고 그 옆에 석비도 세웠다. 비는 3단의 받침위에 비석의 몸체를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 부분의 윗면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대리석으로 다듬은 몸체의 양옆에는 화강암 기둥을 세웠으며, 지붕들은 목조 건물의 기와지붕처럼 막새기와와 기왓골이 표현되어 있다.
이 비는 1379년(고려 우왕 5)에 세워진 비로, 비문의 내용은 당대의 문장가인 이색이 짓고, 비문의 글씨는 당대의 유명한 서예가인 한수가 썼는데 부드러운 필치의 해서체이다. 한편, 글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의 이름을 글의 맨 앞이 아닌 끝부분에 적은 것은 드문 예이다. 전체적으로 고려 후기의 간략화 된 비의 형식이 잘 드러난다.
■ 여주 신륵사 : 보제존자 석종비 음기(普濟尊者 石鐘碑 陰記) 명단
1. 판전교시사 조운흘(判典校寺事 趙云仡 : 문충공 김득배의 셋째 사위)
2. 전낭장 김균(前郞將 金鈞 : 낙성군洛城君의 셋째 아들)
3. 첨의찬성사 김득배처 동주군부인 김씨묘경(僉議贊成事 金得培妻 董州郡夫人 金氏 妙焸 : 문충공文忠公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4. 상락군 김씨묘영(上洛君 金氏妙英 : 문충공 김득배의 딸)
5. 상락군 김씨묘명(上洛君 金氏妙明 : 문충공 김득배의 딸)
6. 상락군 김씨묘 ?(上洛君 金氏妙? : 문충공 김득배의 딸)
7. 김제군 조씨(金堤郡趙氏 : 낙성군洛城君)

■ 서흥김씨의 숨결, 윤필암(潤筆庵)
서흥김씨(瑞興金氏)는 선생의 마나님이 되시고, 윤필암은 마나님이 세우신 문경의 절집이다.
마나님의 부친은 판도판서(版圖判書) 김세구(金世丘)이며, 조부는 김방경의 참모로 삼별초 난 진압과 일본원정에 출정하여 공을 세운 상장군 김천록(金天祿)이다.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밀직사사(密直司事) 이백년(李百年)의 딸이 된다. 이백년은 이천년(李千年〮)•이만년(李萬年)•이억년(李億年)•이조년(李兆年) 등 동생들과 함께 고려사회를 구가하던 명문인데, 특히 이조년은 안향(安珦)의 문하육군자(門下六君子) 중의 한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명 문장가를 배출한 집안이다.
김득배와 함께 홍건적 격퇴 전에 출전했던 이승경(李承慶)은 이천년의 아들로 서흥김씨에게는 외숙이 되며, 난계의 부친 김록과 원경(元京)에서 동방급제한 사람이기도 하다.
김씨에게는 두 오빠와 두 여동생이 더 있었는데, 김봉경(金鳳璟)과 김봉환(金鳳環)이 오라버니가 된다. 김봉환은 공민왕이 안동으로 몽진해왔을 때 안동부사로 공민왕의 뒷바라지를 한 사람인데 매부 김득배가 상주에서 참화를 당하는 장면을 눈물로 지켜봐야만 했다.
하물며 부군(夫君)의 모진참화를 몸소 치러내야 했던 서흥김씨 부인께선 오죽했을까. 여사께선 남편의 숨은 거처를 발설하여 비극을 초래했다는 석연찮은 시선 속에 가군(家君)을 눈물로 떠나보낸 후, 무언가 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셔도 말하실 수 없었던 숫한 애증후박(愛憎厚薄)의 틈바구니에서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해 지내셔야만 했던 그런 회한(悔恨)의 세월을 온 몸으로 받아내다가, 의지해오던 뭇 인연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나자 사재(私財)를 털어 절집 윤필암을 짓고 머리를 깎아 산승(山僧)이 되신 분이시다. 나옹선사로부터 받은 법명이 묘경(妙煚)이라 했다.
이 같은 서흥김씨의 절집창건 이야기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쓴 『동문선』 의 「윤필암기潤筆菴記」에 나온다. 승려 각관(覺寬)과 함께 찬성사 김득배의 부인 김 씨가 1380년(우왕禑王 6년) ‘윤필암(문경시 산북면 대승사 부속 비구니 암자)을 조성[造成; 釋覺寬與金贊成諱得培之室金氏造潤筆菴]’했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같은 내용을 상주의 한문학(漢文學)을 집대성한『상주 한문학』에서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윤필암을 조성한 우왕 6년은 김씨가 대략 63세 때 쯤으로, 남편이 원사(寃死) 한지 18년, 공민왕이 자재위(子弟衛)에게 피살 된지 6년 후의 일이다. 또 이 해는 서흥김씨가 존신하고 따랐던 나옹선사가 열반한지 4년 만으로 선사의 부도비가 신륵사에 세워진 다음해가 된다. 뿐만 아니라 공민왕의 실정을 종종 나무라는 등 김득배의 죽음에 대해서도 동정적이던 홍태후(洪太后: 1298-1382․공민왕의 모후)가 세상을 뜬 해 이기도 하다.
이처럼 남편의 신구(伸救)와 왕생(往生)길에 실마리를 쥔 주변의 인연들이 하나 둘 다 떠나버리자, 어디 희원(希願)을 둘 데가 없어진 김 씨는 모든 업보를 거두어 불심에 귀의하게 된 것으로 이해된다. 그 과정이 지금 여주 신륵사 나옹선사(懶翁禪師)의 탑비(塔碑)인 단월질(檀越秩)에 남아있다.
탑비는 나옹이 양주 회암사에서 물밀 듯 밀려드는 불자행렬에 놀란 조선의 조신들이 들고 일어나는 바람에 밀양의 영원사로 쫓겨 가던 중 신륵사에서 갑자기 입적하자 그를 따르던 제자들이 뜻을 모아 세운 것으로 단월질은 그 참여자들 명단이다.
탑기(塔記)는 나옹과 가까웠던 이색이 글을 짓고 당대의 명필 한수(韓脩)가 글을 썼다.
단월질에는 ‘첨의찬성사 김득배 처 동주군부인 서흥김씨 묘경(僉議贊成事 金得培 妻 董州郡夫人 瑞興金氏 妙煚)’라는 명문을 비롯해 시동생 낙성군의 부인 ‘김제군조씨(金堤郡趙氏) 이름도 있다.
낙성군의 셋째아들 김균(金鈞)도 모친 김제 조씨를 따라 나선 듯 이름이 올라있다. 그 외에 셋째 사위 조운흘(趙云仡)과 상락군 김씨묘영(上洛郡 金氏妙英)과 묘명(妙明), 상락군 묘□(妙□) 등 낯익은 이름들도 잇달았다. 묘영과 묘명, 묘□ 등 이 세 분도 김 씨의 딸들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서흥김씨는 시댁식구들과 자진의 가솔들을 데리고 상주에서 멀리 여주의 나옹선사 다비현장을 찾았던 것이다.
돌아보면, 그간 김 씨는 남편의 신구(伸救)길에는 뭇 신료들을, 찾았지만 이미 공민왕 주변의 바른 말하는 신하들이 거의 제거된 뒤라 김 씨는 달리 의지할 데가 없었고, 다만 남편의 죽음에 일말의 동정심을 갖고 있던 홍태후 만이 유일하게 왕에게 충고하는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일찍이 홍태후는 아들 공민왕이 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내쫒는 실정을 거듭하자 문안드리러 온 왕을 눈물로 나무란 적이 있었다.
“…어째서 정사를 신하에게 위임하시며 공로가 있고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이고 토목공사를 대규모로 진행하여 화기(和氣)를 손상하시오. 왕이 태자로 있을 때에는 백성들이 크게 기대를 가지고 왕이 임금으로 되지 못할까 근심하여 충혜왕의 무모한 짓을 원망하고 있었으며 나도 그렇게 생각하였소. 그런데 왜 도리어 그때만 못하오? …”
라고하자 왕은 불쾌한 빛을 보이며 말하기를,
“…어머니는 왜 그렇게도 아들의 허물을 과장하여 말씀하십니까? 사람을 많이 죽이는 죄는 제가 범하지 않았고 단지 난신(亂臣)을 숙청한 따름입니다.”
라고 변명하면서 이후로 태후를 원망하고 멀리하기 시작 했던 것이다.
사정이 이랬던 만큼, 서흥김씨는 남편의 신원은 오직 홍태후에게 달려있다 보고, 마침 숭경윤(崇敬尹(洪太后殿侍衛府使)ㆍ홍태후 시종관)으로 있었던 시동생(낙성군)에게 그 길을 부탁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선치는 홍태후는 물론, 남편의 문생 정몽주와 사위 노숭(盧嵩)의 은문(恩門) 이색에게도 형님 김득배의 신구에 힘써줄 것을 부탁했을 것이나, 때가 때인지라 진척이 없었고, 부인께서 평소 존신하고 따랐던 나옹마저 열반하자 선사의 탑비준공식에 다녀오고 나서 유일한 신구의 희망이었던 홍태후까지 세상을 뜨자, 김씨는 1380년(우왕禑王 6년) 윤필암을 조성하고 남편의 해원 길에 나섰다.
①청산은 말없이 살라하고 –서흥김씨의 입산-
남편의 신원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태후가 아니던가. 18년의 공덕이 허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후사(後嗣)도 없이 딸 만 다섯을 둔 김 씨로서는 허망하기 짝이 없었고, 새삼 나옹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졌을 것이다.
돌아보면, 김 씨는 석연찮게 남편을 떠나보낸 후 그 죽음을 나옹선사에게 물어오는 등 오랜 불정(佛情)을 쌓아온바 있는데, 선사와 남편과의 인연역시 여사만큼이나 남달랐었다.
남편이 원나라에 머물고 있는 왕기(王祺: 훗날 공민왕)의 의전을 맡아보는 전객부령(典客副令)으로 있으면서 왕자에게 공양드리러 오는 선사와 가까이 지낸 적이 있는데다가, 선사가 1358년(공민왕恭愍王 7년) 귀국하고 부터는 왕사(王師)로서 공민왕을 위해 자주 예불을 올리려 궁궐을 찾았을 때도 왕명출납을 맡아보고 있던 추밀원(樞密院)의 김득배의 손길을 빌렸고, 이때마다 홍태후도 후한 보시를 선사에게 내리곤 했다.
또 20만의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고 왕이 안동으로 몽진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적이 마침 선사가 머물고 있는 해주 신광사(神光寺)까지 넘보려 들었으나, 김득배의 유군(遊軍)에 발이 묶여 나옹이 무사한 적도 있었다.
아마도 김 씨는 남편이나, 선사나, 홍태후 같은 뭇 인연들과 회자정리(會者定離)를 하면서 여생을 나옹의「청산혜(靑山兮)」처럼 사랑도 미움도 훌훌 다 벋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아가며 불심에 전념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김 씨는 말없이 살려고 머리를 깎아 청산에 들었고, 티 없이 창공을 벗 삼으려고 불심을 두드렸다. 부군의 해원을 위한 마지막 도리가 오직 이 길 뿐이라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김 씨의 행적을 줄 곳 보아온 이색이 마침 각관스님이 김 씨와 더불어 절집을 짓고 사찰 창건기를 부탁해오자, 이색이 윤필암기를 남기게 되었다.
김 씨는 뜻하지 않은 남편의 죽음 앞에서 의분과 자책, 그리고 그믐밤 같은 절망 앞에 갖은 책망을 눈을 감는 순간까지 그 작은 가슴으로 받아내며 스스로 자신을 모질게 채찍질해오다가, 끝내 산승(山僧)의 몸으로 남편의 그 외로운 영혼 끌어안고 눈을 감으신 분입니다. 김 씨로선 죽는 날 까지 앉고 가야할 앙금이었지요.
그때의 남편 참화사건이 누군가가 속죄양이 더 필요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비켜설 수도, 거역할 수도, 항변 할 수도, 둘러댈 곳도 없는 그러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속죄양말이지요.
그러나 어떤 이들은 돌아서서 김 씨에게 원망의 시선을 흘리곤 하나봅니다. 아마도 그건 남편의 극단적인 죽음을 맞게 한 빌미가 더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김 씨의 입장에 서보지 않고서는 무슨 구실로도 그녀를 성토할 자격이 없습니다. 돌아서서 남몰래 흘렸을 그녀의 참회의 눈물을 상상이나 해 보셨는지요.
김 씨 역시 남편 못지않은 희생자요 피해자일 뿐입니다. 오히려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줄 묘약이 필요한 때입니다.
☐ 나옹선사(1320~1376)의 〈청산가〉 맑고 아름다운 선시(禪詩) 두 편을 소개한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지금까지 지루할 정도의 긴 글로 서흥김씨를 재조명 하고 나선 것도 조금이나마 묘경스님의 심경으로 다가서보고자 함에서 입니다.
이 내용은 2008년 1월 22일 20시 45분 안동불교방송에서 대담형식으로 자세히 보도를 한바 있습니다.
■ 기(記) : 윤필암기(潤筆菴記)
목은(牧隱) 이색(李穡)
潤筆菴記[李穡]
四佛山。一名功德山。西天指空師所名也。釋覺寬與金贊成諱得培之室金氏。造潤筆菴。走書求記。其言曰。山中有菴曰妙寂。了然禪師居之。懶翁出家處也。今懶翁旣寂。舍利遍國中。寫眞以供養者。又不可以一二計矣。然皆游歷之地。未必皆平日所留意。何也。不三宿桑下是已。若其最初發跡之地。剃以去煩惱。戒以受毗尼。所謂千聖不傳向上一路。所由始也。所由入也。悟道於檜巖。印可於平山。皆從此中出。說法於大都。爲師於先王。亦從此中出。則功德山。實爲懶翁之本元矣。懶翁旣寂矣。藏其舍利。垂其眞以供養者。今之求功德者之恒事也。亦知所謂眞功德乎。功德山。由懶翁名益傳。世之歆懶翁。以修功德者。又如此其廣。功德在山乎。在懶翁乎。在奔走禮拜者乎。請先生一言以記。予曰。吾聞功德山。在大院東。有峯突然而起。有大石。斲四如來形。皆四尺餘。凡求福者。群趨之此山。得名之由也。聖智妙圓。體自空寂。菴之名。豈虛立哉。求功德於妙寂。皆如懶翁斯足矣。倂著之。庚申秋八月初吉記。
윤필암기(潤筆菴記)
목은(牧隱) 이색(李穡)
사불산(四佛山)을 일명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지공(指空) 스님이다.중 각관(覺寬)과 찬성(贊成)이었던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가 이 산에다 윤필암이란 절 을 짓고, 윤필암 기(記)를 지어달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에는 「“산 가운데 있는 암자 를 묘적암(妙寂菴)이라 하는데, 요연선사(了然禪師)께서 계셨고, 나옹(懶翁)스님께서 출가 (出家 처음으로 중이 됨)한 곳입니다. 지금은 나옹스님은 떠났으나 사리는 온 나라에 펴졌 으며, 그림을 그려서 모시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스쳐 가신 땅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꼭 이런 곳을 다 평소에 유의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은 뽕나무 아래서 사흘 밤을 계속해 자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 출발한 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 머리를 깎음으로써 번뇌를 씻어버린 곳이요, 계명을 받음으로써 중이 된 곳이니, 이른바, ‘여러 성인이 전하지 못한 종문(宗門)의 지극한 곳[極處]’으로 지향하는 출발이 이에서 시작된 것이며, 도에 들어감도 이에서 시작되었다 하겠습니다. 도를 회암(檜巖)에서 깨닫고, 얻은 것을 평산(平山)에서 인정받으신 것도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서울에서 설법해서 선왕(先王)의 스승이 되신 것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니, 공덕산은 사실로 나옹의 본바탕이 되는 곳입니다. 나옹은 벌써 돌아가셨으되 그분의 사리를 간직하고, 그림을 모시어 공양하는 것은 오늘날 공덕을 구하는 사람들의 보통 일입니다마는, 소위 참된 공덕을 알고 그러는 것입니까? 공덕산은 나옹 때문에 이름을 더욱 전하게 되었고, 세상에서 나옹을 흠모하여 공덕을 닦는 사람도 그와 같이 넓은 지역에 깔렸으니, 따져볼 때 공덕이 산에 있는 것인지 나옹에게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아니하면 분주하게 다니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지, 선생께서 한 말씀으로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었다.나는 이 글을 받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공덕산이 대원(大院) 동쪽에 있는데 우뚝 솟은 봉 위에 큰 돌이 네 갈래로 갈라졌고, 높이가 모두 넉 자 남짓한데, 마치 부처님의 모양 같으므로 복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떼를 지어 몰려와서 기도하기 때문에, 이 산을 ‘사불산(四佛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聖)ㆍ지(智)ㆍ묘(妙)ㆍ원(圓)은 그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한 것이니, ‘묘적암(妙寂菴)’이란 이름인들 어찌 근거 없이 생겼겠는가. 공덕을 묘적암에서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옹과 같이 하면 족할 것이다.” 하였다 아울러 드러낸다. 경신 추 8월 초하루 기한다.
∎ [주D-001]중은 …… 않는다 : 노자(老子)가 오랑캐 나라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뽕나무 아래서 세 밤을 거듭 자지 않았다. 이것은 오래 있음으로써 은애(恩愛)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後漢書)
∎ [주D-002]여러 …… 곳[極處] : 종문의 지극한 곳을 향상일로(向上一路)라고 하는 데, “향상일로는 천성(千聖)으로 전하지 못했다.” 한다. (碧巖鐘電)
∎ 목은(牧隱) 이색(李穡) : (1328.6.17.~1396.6.17.)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자, 시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 혜근(惠勤) : 호 나옹(懶翁) 또는 강월헌(江月軒). 시호 선각(禪覺). 법명 혜근(惠勤) 1320(충숙왕 7)~1376(우왕 2) 5월15일졸. 회암사 주지, 원나라 연경의 광제선사 주지 엮임.
∎ 윤필암(潤筆庵) : 경북 문경시 산북면 사불산(四佛山)에 있는 대승사(大乘寺)의 부속 암자인 윤필암은 고려후기인 1380년(우왕 6) 승려 각관(覺寬)과 찬성(贊成)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서흥김씨(瑞興金氏)가 창건하였다. 나옹화상(懶翁和尙)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사찰로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이 기문(記文)을 썼다.

숭의전은 문종 2년(1452년) 이름을 짓고, 고려 왕조 4왕인 태조(太祖),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元宗)의 위패와 고려공신 16인 중 「난계 김득배, 포은 정몽주」와 함께 모시고, 조선시대에는 고려조 왕씨(王氏) 후예로 하여금 전각(殿閣)의 수호와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현재 봄, 가을 두 번의 향사(享祀)를 봉행(奉行) 하고 있다.
☐ 고려통일대전에 향사(享祀) 배향위(配享位)
高麗 太祖 神聖大王外 33位의 列王과 忠臣·功臣 제현을 봉안
☐ 상산김씨 배향위 휘(商山金氏 配享位 諱)
1. 문충공파 김득배(金得培) 정당문학(政堂文學)
2. 상산군파 김득제(金得齊) 삼사우사상장군(三司右使上將軍)
3. 낙성군파 김선치(金先致) 계림부윤(鷄林府尹)
4. 통사공파 김신보(金臣寶) 도통사(都統使)
5. 제학공파 김 후(金 後)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