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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득제(得齊)
상성군 휘 록(祿)공의 차자로 추충분의안사 좌명공신 중대광 삼사우사 상장군 상산군(商山君)이시다. 충숙왕 2년 을묘에 탄생하셨고 충혜왕 원년 경진 4월에 십운시문과에 장원급제하셨다. 공민왕 10년 신축에 홍건적이 침입하여 당시 추밀원직학사로 왕을 모시고 남으로 어가를 호종하며 피난할 때 장군이 되시어 적을 파하고 곤경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셨다. 이때 상주목사 조진이 군사 일 천사백을 거느리고 오거늘 왕이 대장군 공에게 거느리게 하였다.
공민왕 11년 임인에 판각문사가 되시고 개경수복에 공을 세우시니 추충분의만사 좌명공신 중대광벼슬을 내리시고 화상을 그려 벽에 붙이고 녹공일등이라 하시고 또한 전답백결과 노비10구도 하사하였다. 그러나 이를 시기한 간신 김용이 흉계를 꾸며 백형정당 문학득배를 살해하고 후환이 두려워 공을 화산으로 유배시켰다.
공민왕 12년 계묘에 간신 김용을 환형으로 처형하고 공은 구면 복작되었다. 우왕2년 병진에 의주원수를 제수 받으시고 우왕 3년 정사 10월에 영주아주에 왜구가 침입하니 공이 왕안덕 목충 등과 함께 격퇴하였다. 우왕 4년 무오에 왜구가 해주평주에 침입하니 공이 최영 이희필 양백년 등과 함께 격퇴하였다. 삼사우사에 제수되시어 또 왜구가 영산밀양 등지에 대거 침입하니 왕이 공과 이성계 이림 류만수 등과 함께 대파하니 사불낭송지 및 지리산으로 격퇴하였다.
상산군에 봉해지시고 우왕 7년 신유에 왜구가 진포한주에 침입하니 그 지역방어책 왕안덕이 원병을 청하니 왕이 공에게 명하며 격퇴하라 하시니 공미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격퇴시켰다. 이조 태종이 추봉상상군하시고 공은 형 난계(蘭溪) 득배(得培)와 아우 낙성군(洛城君) 선치(先致)와 더불어 문장과 덕행이 당세에 출중하였고 국가가 위기 위망하면 공창대의로 출전하여 남정북벌하시니 공훈이 솥발같이 세우시며 녹공 일등이라 하시고 세칭 삼원수라 하였다.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고 용인정암서원에 배향되시고 졸년과 묘소는 실전되었다. 순조무자에 후손상종 술초 등 이단을 모으고 비를 세우니 금상주 문경산 양면 명빈포내 백영동에 공의 3자 총제공 배위 문화류씨묘 상왼편에 유좌원하고 매년 향사하다. 예조참판 진양강세륜이 비문을 찬하고 음기하였다. 순종후 경진년에 후손 군수 기환이 단비를 개수하고 병서하였다. 광복후 6·25동란에 비문 자획이 파손되어 후손의 성금으로 신미년 청명일에 단비를 개수하고 석물도 갖추었다.
■ 상산군파(商山君派) 파조(波祖)의 단소 및 재실

■ 상산군파(商山君派) 파조(波祖)의 행적(行蹟)
▪ 파 조 : 휘(諱) 득제(得齊)
▪ 생 몰 : ?∼?
▪ 가 계 : 좌대언(左代言) 김록(金祿)의 차자(次子)
▪ 관 직 : 삼사우사상장군(三司右使上將軍)
▪ 과 거 : 문과
▪ 군 호 ; 상산군(商山君)
▪ 주요행적 :
1345년(충목왕 1년, 을유) 4월에 십운시문과(十韻詩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다. 1361년(공민왕 10년, 신축(辛丑)) 홍건적(紅巾賊)이 20만 대군으로 침입하여 개경이 함락되자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로 왕의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여 안동(安東)으로 피난하였는데 이때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적군을 격파(擊破)하고 곤경에 빠진 백성을 구제(救濟)하셨다. 다음 해 판각문사(判閣門事)가 되어 개경(開京)을 수복(收復)하는 데 공(功)이 커서 추충분의안사좌명공신중대광(推忠奮義安社佐命功臣重大匡) 삼사우사(三司右使) 도형벽상(圖形壁上) 1등 공신(功臣)에 오르고 전답(田畓) 100결(結)과 노비(奴婢) 10구(口)도 하사(下賜)받았다. 그러나 당시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과 권력을 다투던 참지정사(參知政事) 대역(大逆) 간신(奸臣) 김용(金鏞)이 흉계를 꾸며 백형(伯兄) 김득배(金得培)를 살해하자, 이에 연좌(緣坐)되어 화산(花山)으로 유배(流配)되었다. 1353년(공민왕 2년, 계사(癸巳)에 간신(奸臣) 김용(金鏞)이 처형(處刑)되자 관직(官職)을 다시 받았다.
1376년(우왕 병진(丙辰))에 의주원수(義主元帥)가 되었으며 이듬해 10월에 왜구(倭寇)가 영주(寧州)와 아주(牙州)에 침입하자 왕안덕(王安德) · 목충(睦忠) 등과 함께 격퇴(擊退)하였다.
1378년에 왜구가 해주(海州)와 평주(平州)까지 침입하자 최영(崔瑩) · 이희필(李希泌) · 양백연(楊伯淵) 등과 함께 격퇴하였고 그 뒤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또 왜구가 영산(寧山)과 밀양(密陽)에 침입하자,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이성계(李成桂) · 이림(李琳) · 류만수(柳曼殊) 등과 함께 우인열(禹仁烈)을 도와 이틀 격퇴(擊退)하였는데 적장(賊將) 사불낭송지(沙弗浪松旨)는 지리산(智異山)에 이르러 항복(降伏)하였다. 이 전투(戰鬪)에서 이룩한 공(功)으로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1381년에 왜구(倭寇)가 다시 진포(鎭浦)와 한주(韓州)에 침입하여 왕안덕(王安德)이 구원병을 청(請)하므로 왕명(王命)을 받고 출전(出戰)하여 격퇴하였다.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朝鮮)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섬기기가 불가하여 고향으로 낙향(落鄕)하여 은둔(隱遁) 기거(寄居)하였으며 태종(太宗) 때 이르러 다시 상산군(商山君)에 봉(奉)해졌다. 형 김득배(金得培)와 아우 김선치(金先致)와 함께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당세(當世)에 출중(出衆)하였고 국가가 위기(危機)에 처했을때 함께 대의를 부르짖으며 출전(出戰)하여 남쪽을 정벌(征伐)하고 북쪽을 토벌(討伐)하니 세상 사람들이 ‘삼원수(三元帥)' 라 칭(稱)하였다.
묘소(墓所)는 전하지 않아 문경(聞慶) 산양면(山陽面) 영빈포(穎濱浦) 안 백영동(百英洞)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묘표(墓標)는 예조참의(禮曹參議) 강세륜(姜世綸)이 지었으며, 용인(龍仁) 정암서원(正巖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슬하(膝下)에 3남 8녀를 두셨으니 장남은 광흥부사(廣興府使) 김연(金涓)이고, 다음은 이조참판(吏曹參判) 김장(金漳)이며, 다음은 총제중추원사(摠制中樞院事) 김흡(金洽)이다. 장녀는 보리공신(保理功臣) 청도인(淸道人) 김한귀(金漢貴)의 아들인 중서사인(中暑舍人) 김린(金潾)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진주인(晉州人) 정택(鄭澤)의 아들인 정의생(鄭義生)에게 시집갔는데 이로인해 진주정씨(晉州鄭氏)가 상주(尙州)지역에 살게 되었으며, 다음은 소감(少監) 이징(李澄)에게 시집갔고, 다음 호조판서(戶曹判書) 김관도(金觀道)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여산인(礪山人) 전서(典書) 송희(宋禧)의 아들 송계성(宋繼性)에 시집갔고, 다음은 판서(判書) 황호(黃琥)에게 시집갔으며, 다음은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 상주인(尙州人) 박윤창(朴允昌)에게 시집갔다.
⼞ 상산군파 파조 김득제(金得齊) 선조 님의 금석문 자료
高麗 推忠奮義安社佐命功臣 重大匡 三司右使上將軍 商山君 商山金公 祭壇碑文
商山之金出系鷄林璿派世承簪組爲東方著姓公諱得齊父諱祿左代言大父 諱鎰門下贊成事曾大父諱之衍翰林學士公在麗朝 忠穆恭愍之際文而樹武功列爵爲商山君與兄政堂文學得培弟洛城君先致勳業鼎立至今稱勝國三元帥呼其偉矣於乎今去公之世已四百有年年代綿邈文獻莫能詳然其在譜牒有曰 忠穆乙酉魁十韻詩文科在麗史者曰卒耦時同我 太祖討倭有功曰 恭愍王辛丑紅巾之亂尙州牧趙瑨以兵一千四百來王以大將軍金得齊領之噫斯可以不朽公事功耳夫何多乎哉公有三子八女子涓副使漳參議洽摠制女不錄參議子遇陽部令仲陽季陽並萬戶穉陽司正摠制子師舜將軍師禹兵判師武監察孟達校理出后涓曾玄以下不盡錄而最顯者監察公七世孫貴榮左議政外裔之毓慶沙麓者礪良府院君宋玹壽誕 定順王后淸風府院君金佑明誕 明聖王后乎州北山陽之縣瀕水之濱卽三元帥嶽降舊址而商山金氏塋域相望焉獨公衣履之藏無可指認乃遠孫商鍾述祖等慟香火之無所謨湖嶺諸宗設壇豎碑於白英洞摠制公墓傍將以修歲事噫公靈洋洋如水在地局牲豆有踐椒酒升香於此乎於彼乎吾知其右享之必而矧玆氣類之感無間於泉塗則今日之壇於是祭於是亦可謂起義緣情禮不失於厚乎商鍾等要不佞記之名無文者固無能爲役其溯本追遠之誠之摯謹鑱之陰如左
英祖四十四年戊子淸明日行禮曹參判晉陽姜世綸謹撰
고려 추충분의 안사좌명공신 중대광 삼사우사 상장군 상산군 상산김공 제단비문
(高麗推忠奮義安社佐命功臣重大匡三司右使上將軍商山君商山金公祭壇碑文)
상산김씨(商山金氏)는 선대(先代)가 계림(鷄林)의 선파(璿派)
에서 나왔는데 대대로 큰 벼슬아치들이 잇따라 배출(排出)되어 우리나라의 저명(著名)한 성씨(姓氏)가 되었다. 공(公)의 휘는 득제(得齊)이다.
아버지 휘 녹(祿)은 좌대언(左代言)이고 할아버지 휘(諱) 일(鎰)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이며 증조 휘 지연(之衍)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이다.
공(公)은 고려조(高麗朝) 충목왕(忠穆王)과 공민왕(恭愍王) 때의 문인(文人)으로 전장(戰場)에서 공(功)을 떨쳤고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한 뒤 상산군(商山君)에 봉해졌다.
형(兄) 정당문학(政堂文學) 득배(得培)와 아우 낙성군(洛城君) 선치(先致)와 함께 공적(功績)을 정립(定立)하여 지금까지도 고려(高麗) 시대(時代) 삼원수(三元帥)라 칭(稱)하며 그 위업(偉業)을 말하고 있다.
아! 공(公)께서 세상(世上)을 떠나신 지가 이미 700여 년(餘年)이 지나다 보니 세월(歲月)이 오래 흘러 문헌(文獻)이 자세(仔細)하지 못하다. 그러나 족보(族譜)에는 충목왕(忠穆王) 을유년(乙酉年)(1345)에 십운시문과(十韻詩文科)에 장원(壯元)을 차지하였다고 되어 있고, 『고려사 高麗史』에는 나라가 어려울 때에 우리 태조(太祖)와 함께 왜적(倭敵)을 토벌하여 공(功)을 세웠다고 되어 있으며 공민왕(恭愍王) 신축년(辛丑年)(1361)에 홍건적(紅巾賊)이 난(亂)을 일으키자 상주목사(尙州牧使) 조진(趙瑨)이 군사 1400명을 거느리고 왔는데 왕이 대장군(大將軍) 김득제(金得齊)에게 군사를 통솔(統率)하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아! 이는 사라지지 않은 공사(公事)에 공적(功績)들이니 어찌 많다고 하지 않겠는가.
공은 3남 8녀를 두었으니 아들 연(涓)은 부사(副使)이고 장(漳)은 참의(參議)이며 흡(洽)은 총제(摠制)이다. 여식(女息)은 기록(記錄)하지 않는다. 참의(參議)의 아들 우양(遇陽)은 부령(部令)이고 중양(仲陽)과 계양(季陽)은 모두 만호(萬戶)이며 치양(穉陽)은 사정(司正)이다.
총제(摠制)의 아들 사순(師舜)은 장군(將軍)이고 사우(師禹)는 병판(兵判)이며 사무(師武)는 감찰(監察)이고 맹달(孟達)은 교리(校理)인데 연(涓)의 뒤를 이었다.
증손(曾孫)과 현손(玄孫) 이하는 모두 기록하지 못하며, 가장 현달(顯達)한 이는 감찰공(監察公)의 7대손 귀영(貴榮)은 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하였고, 외후손(外後孫)이 왕후(王后)를 배출(排出)한 경사(慶事)가 있었으니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宋玹)이 정순왕후(定順王后)를 낳았고,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명성왕후(明聖王后)를 낳았다.
상주 북쪽 산양면(山陽면(面)) 영빈포(穎濱浦) 안 삼원수(三元帥)께서 태어난 옛터이며, 상산김씨의 묘소가 서로 이어져 있으나 다만 공의 묘소(墓所)만은 가리키어 확인(確認)할 수가 없다.
이에 원손(遠孫) 상종(商鍾)과 술조(述祖) 등이 제사를 올릴 곳이 없음을 슬퍼하여 호남과 영남의 종인(宗人)들과 의론(議論)해서 백영동(白英洞) 총제공(摠制公)의 묘소 곁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비석(碑石)을 세워 매년 11월 13일을 정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아! 공의 신령(神靈)이 넓고 넓어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으니 제물로 초주(椒酒)
를 차려놓고 제사를 올린다면 이곳과 저곳에서 흠향(歆饗)할 것임을 나는 안다. 더구나 의기(意忌)가 서로 감응(感應)하여 묘소(墓所)와 다름이 없으니 오늘 이곳에 단(檀)을 만들고 이곳에서 제사(祭祀)를 올리는 것은 또한 의(義)를 일으키고 정리(情理)를 따름에 후(厚)함을 잃지 않았다고 이를만하다.
상종(商鍾) 등이 나에게 비석에 세길 글을 요구(要求)하니 글을 못 하는 내가 참으로 이 일을 할 수는 없지마는 그들이 근본(根本)을 거슬러 올라가 먼 조상(祖上)을 생각하는 정성이 지극(至極)함에 감동하여 삼가 후면(後面)에 이와 같이 각(刻) 하노라.
영조(英祖) 44년 무자(1768) 청명일(淸明日)에 행예조참판(行禮曹參判) 진양(晉陽) 강세 륜(姜世綸)
삼가 글을 짓다.
■ 모원제(慕遠齊)에 배향(配享)되는 선조(先祖)
◆ 12세 휘(諱) 흡(洽)
상산군(商山君) 득제(得齊)의 삼자(三子)이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총제(摠制) 중추원사(中樞院事)를 지냈으며 묘(墓)는 문경시 산양면 반곡리 백영동 서마당길 을좌(乙坐)에 있으며 순조(純祖) 경진(庚辰)에 후손(後孫) 군수(郡守) 기환(基煥)이 개수찬갈(改竪撰碣)하고 병서(並書)하다. 배위(配位)는 문화 류씨(文化柳氏)며 부사(府使) 운(沄)의 따님으로 목사(牧使) 유(濡)의 손(孫)이다. 묘(墓)는 고위(考位) 단하(壇下) 유좌(酉坐)이다.
◆ 13세 휘(諱) 사순(師舜)
통정대부(通政大夫) 총제(摠制) 중추원사(中樞院事) 흡(洽)의 4형제(兄弟) 중 장남(長男)으로 중직대부(中直大夫)를 역임(歷任)하시고 슬하(膝下)에 2男 2女를 두었다. 長男은 건공장군(建功將軍)을 2남은 부장(副長)을 지낸 근(瑾)이다. 배위(配位)와 공(公)의 묘(墓)는 실전(失傳)되었으나 모원제(慕遠齊) 후편(後便)에 단(壇)을 조성하여 매년(每年) 10월(月) 13일(日) 상산군(商山君)파 제실(祭室) 모원제(慕遠齊)에서 향사(享祀)하다.
◆ 13세 휘(諱) 사우(師禹)
총제공(摠制公) 흡(洽)의 차자(次子)로 자(字)는 근부(勤父)이고 단종(端宗)의 장인(丈人)이다.
단종(端宗) 2년(1454년)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가 되었으며 다음 해에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等)에 제수(除授) 되었다. 세조(世祖) 2년(1456)에는 충청도(忠淸道) 수군(水軍) 안무(按撫) 처치사(處置使)가 되었고 1458년 회령진(會寧鎭)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가 되었다. 이때 야인(野人)이 대규모로 장성(長城)에 침입(侵入)하자 이를 평정(平定)하여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이르셨다.
1460년 회령(會寧) 절제사(節制使) 부사(府使)를 거쳐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그 후 영의정(領議政) 신숙주(申叔舟)가 함길도(咸吉道)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천거(薦擧)하여 침략자 야인(野人)인 토벌(討伐)한 후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어 오늘날 전(傳)하고 있다.
承恩天日近(승은천일근)
建節寒雲平(건절한운평)
男兒圖結草(남아도결초)
聖主倚長城(성주기장성)
임금의 은총(恩寵)은 하늘 해에 가깝고
절모(節旄) 세웠으니 변방(邊方)의 전운(戰雲)을 평정(平定)하겠구나
남아(南兒)가 결초보은(結草報恩)을 도모(圖謀)하였으니
성군(聖君)이 장성(長城)을 그대에게 맡기겠구나.
다시 북방(北方)으로 나아가 야인(野人)과 대적(對敵)하여 크게 전공(戰功)을 세우고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61년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고 이어 평안도(平安道) 도절제사(都節制使)로 부임(赴任)했다가 이어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역임하였다.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시호(諡號)는 장절공(壯節公)이다. 단종(端宗) 2년 을해(乙亥) 6월에 세조(世祖)가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니 칭병(稱病)하여 벼슬길을 그만두고 국구(國舅) 송현수(宋玹壽)와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상왕(上王) 복위(復位)를 도모(圖謀)하다가 세조(世祖) 3년 정축(丁丑) 6월에 정창손(鄭昌孫)의 고변(告變)으로 순흥(順興)에 유배(流配)되었다.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양(良)이고 다음은 통덕랑(通德郞) 찬(瓚)이며 여식(女息)은 단종비(端宗妃) 숙의(淑儀)이다. 말년(末年)에 병상(病床)에 들자 임금이 어의(御醫)를 명(命)하여 이를 치료하게 하여 주상(主上)의 은혜가 두터웠고 여력(膂力)이 남보다 뛰어나고 무예(武藝)에 출중(出衆)하여 청렴(淸廉).정직(正直).공정(公正)하여 사람들의 탐욕스럽고 불선(不善)한 것을 보면 반드시 경계(警戒) 규제(規制) 하였다. 세조(世祖) 10년(1464년) 50세(世)를 1기(期)로 졸(卒)하였다.
적(敵)을 이기고 강(强)한 것은 장(壯)이라 하고 청렴(淸廉)한 것을 좋아하고 극기(克己)하는 것을 절(節)이라 한다. 장절공(壯節公)의 묘(墓)는 문경 호서남면 공평동 유곡(幽谷) 묘좌(卯坐)이고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 우의정(右議政) 이인손(李仁孫)의 따님으로 묘(墓)는 쌍분(雙墳)으로 유비(有碑)하다.
[ 왕조실록(王朝實錄) ]
◆ 13세 휘(諱) 사무(師武)
총제(摠制)공 흡(洽)의 삼자(三子)로 봉훈랑(奉訓郞)과 시행사(試行司)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묘(墓)는 문경시 산양면 반곡리 백영동 서마당길 옥녀봉 아래 술좌(戌坐)에 있다.
단비(壇碑)는 1973년(年) 3월(月) 후손(後孫)인 상태(相兌) (의성 상산한의원장)가 짓고 진성인(眞成人) 이원기(李源箕)가 섰다. 그 후 2008년(年) 국군 체육부대가 문경시로 유치되어 체육부대(體育部隊) 부지(敷地)로 결정(決定)되어 문경시 산양면 반곡리 백영동 모원재사 후편 모주(母主)인 숙부인(淑夫人) 문화류씨(文化柳氏) 묘소(墓所) 아래로 이장(移葬)하고 비(碑)를 세웠다.
슬하(膝下)에 2남을 두었으니 장남(長男) 련(璉)은 판종부사사(判宗府寺事)를 지냈고 2남은 호(瑚)로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를 지내고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역임하였다.
◆ 14세 휘(諱) 규(珪)
장군(將軍) 사순(師舜)의 아들이며 중직대부(中直大夫)와 건공장군(建功將軍)을 지냈다. 묘(墓)는 문경시 산양면 반곡지 전산(前山) 간좌(艮坐)이고 배위(配位)는 숙인(淑人) 상주(尙州)김씨(金氏)이며 자우(自友)의 따님으로 표는 합분(合墳)이다.
[ 세보(世譜) ]
■ 명현선조(名賢先朝)
◆ 20세 휘(諱) 귀영(貴榮)(1520-1593)
파주목사(坡州牧使) 사원(士元)의 손자(孫子)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응무(應武)의 아들이며 자(字)는 현경(顯卿)이고 호(號)는 동원(東園)이다. 중종(中宗) 15년(서기 1520년) 11월 1일에 낳고 중종(中宗) 35년(서기 1540년) 사마시(司馬試)에 급제(及第)하여 진사(進士)가 되고, 명종(明宗) 2년(서기1547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한림(翰林)과 남상호당(南狀湖堂)을 거쳐 여덟 번이나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아홉 번이나 중원(中原)에 정사(正使)로 들어갔으며 호당(湖堂)에 세 번이나 뽑혔고, 여섯 번이나 문형(文衡)에 올랐다. 그 뒤 조정(朝庭) 최고(最高)의 영직(榮職)인 추충분의(推忠奮義) 협책(協策) 평란공신(平亂功臣)과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의정겸영(左議政兼領) 홍문관(弘文館) 대제학(大提學)을 비롯하여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 지춘추관(知春秋館) 성균관사(成均館事)와 관상감사(觀象監事)를 지냈으며, 선조(宣祖) 23년 경인(庚寅) 정여립(鄭汝立)의 난(亂)을 평정하여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었다. 기사공(耆社公)께서는 선조(宣祖) 10년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재임(在任)시 황산대첩(荒山大捷) 비문(碑文)을 찬(撰)한 바 있다. 묘(墓)는 중원군 소태면 구룡리 남쪽 기슭에 임좌(壬坐)이고 신도비(神道碑)는 영의정(領議政) 채제공(蔡濟恭)이 지었으면 판서(判書) 한치응(韓致應)이 쓰고 판서(判書) 정범조(丁範祖)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또 묘지(墓誌)는 승지(承旨) 한광식(韓光植)이 지었으며 유사(遺事)는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이 찬(撰)하였고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남원윤씨(南原尹氏)로 집의(執義) 관(寬)의 따님이고, 첨사(僉事) 취(就)의 손(孫)으로 슬하(膝下)에는 자녀가 없고 묘는 합폄(合窆)이다. 계배위(繼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남양홍씨(南陽洪氏)이며 현령(縣令) 흡(洽)의 따님이고 위장(衛將) 인필(仁弼)의 손(孫)으로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였다. 묘는 고묘(考墓) 아래 자좌(子坐)이다.
삼배위(三配位) 정경부인(貞敬夫人)은 함안이씨(咸安李氏)로 주부(主簿) 계형(繼亨)의 따님이고 경력(經歷) 장수(長水) 황범(黃範)의 외손(外孫)으로 슬하(膝下)에 1남 1녀를 두었다. 임진란(壬辰亂)에 공(公)과 함께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을 관북지방(關北地方)으로 피신(避身)시 총책(總責)인 동원공(東園公)을 따라 회령(會寧)에 이르렀을 때 적병(敵兵)이 사위(四圍)를 포위(包圍)하니 부인(夫人)이 놀라 욕(辱)스러움을 면(免)하기 어려움을 알고 그해 7월 23일 수건(手巾)으로 스스로 목을 매어 자결(自決)하였다. 계사년(癸巳年)에 그의 정절(情節)을 표창(表彰)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정려각(旌閭閣)을 세웠다. 묘(墓)는 건위(乾位) 부우(祔右)이다.
[왕조실록(王朝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전고대방(典故大方), 상신록(相臣錄), 문형록(文衡錄), 호당록(湖堂錄), 공신록(功臣錄)]

甫尹 : 高麗時代에 둔 鄕職 八品階
通政大夫 : 文班의 正三品
樞密院副使 : 高麗時代 正三品의 벼슬
判閤門事 : 文筆에 從事하는 正三品의 벼슬
佐命功臣 : 太宗代 四十六名에 내려진 功臣品階
重大 匡 : 從一品의 文官品階
三司右使 : 三司에 내려진 正三品 벼슬
易姓革命 : 王朝가 바뀌는 일
配享 : 功臣의 神主를 宗廟에 모시는 일
府使 : 開城府의 으뜸벼슬
牧使 : 地方行政官에 派遣된 館吏
正憲大夫 : 武班에 正二品 벼슬
兵曹判書 : 六曹가운데 軍事와 郵驛에 關한 業務를 擔當
諡號 : 宰相이나 儒賢들의 死後에 내려진 이름
貞夫人 : 朝鮮時代 正,從二品 文武官 아내에게 주는 封爵
奉訓郞 : 朝鮮時代 從五品의 品階
司憲府 : 政事를 論意하고 非行을 管理하는 部署
監察 : 規律과 構成員의 行動을 觀察하는 일
中直大夫 : 東班의 從3品 벼슬 品階
建功將軍 : 朝鮮時代 從三品에 該當하는 文官의 品階
司馬試 : 生員과 進士를 뽑던 科擧制度 初試와 覆試가 있다
謁聖文科 : 임금이 成均館 文廟에 參拜한 뒤 보던 科擧試驗
翰林 : 임금의 말과 글을 맡아 遂行하던 벼슬
南狀湖堂 : 벼슬아치가 모여 앉을 때 벼슬의 차례에 따라 남쪽에 앉던 벼슬
吏曹判書 : 正二品의 吏曹에 으뜸벼슬
湖堂 : 젊은 文官가운데, 뛰어난 人材를 뽑아 休假를 주어 오직 學文硏究에만 專念하게 하던 制度
文衡 : 글을 平價하는 機關, 大提學을 달리 이르는 말
崇祿大夫 : 文班의 從一品 벼슬
左議政 : 議政府에 속한 百官을 統率하는 곳
弘文館 : 임금의 諮問役割을 하는 곳
大提學 : 弘文館 藝文館의 으뜸 벼슬
知春秋館事 : 春秋館의 正二品 벼슬
成均館事 : 成均館 業務를 管掌하는 從二品 벼슬
觀象監 : 禮曹에 屬하고 天文地理 氣候觀測을 擔當하는 正5品
戶曹判書 : 戶曹에 으뜸벼슬
荒山大捷碑 : 全羅北道 南原市 雲峯邑에 있는 朝鮮時代 李成桂의 荒山大捷 勝戰을 記錄한 碑
判書 : 六曹의 으뜸벼슬
僉事 : 水軍을 다스리던 從三品의 武官
旌閭閣 : 忠臣 孝子 烈女 等을 기리기 위해 세운 旌門
祔右 : 夫婦 合葬時 아내를 남편의 오른쪽에 묻음
經歷 : 高麗時代 三軍都摠府에 屬한 從4品의 벼슬
衛將 : 각 地方에 있는 殿廟를 守護하던 首官벼슬
主簿 : 王命의 出納과 國家의 文書를 管理하던 직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