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상담센터
항상 친절히 안내하겠습니다.
054-534-0300
상담시간 09:00 - 18:00파종중회 소개
파종중회 소개
휘 선치(先致)
추중보절찬화공신으로 중대광낙성군(洛城君)에 봉군되시고 시호는 문충(文忠)이시다. 고려27대 충숙왕 무오년(1318년) 10월 15일에 탄생하셨으며 17세로 나주판관에 배수후육위랑장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는데 공이 있으셨다.
고려31대 공민왕 8년 기해년(1359년)에 행촌이암(杏村李碞)장군 막하에 종군하여 홍건적을 방어할 때 도원수 이암이 적의 군량을 끊기 위해 나라의 곡식창고를 불태우라고 명하려 하자 공께서 왈 만약 창고의 곡식을 불태우면 적은 군량을 구하고자 갑자기 나라 깊숙이 침입할 것이니 상계책이 아니라고 진언하니 도원수가 이에 따랐다고 한다. 그 후전법판사에 배수되시고 홍건적을 평정하신 훈공이 너무나 높으므로 초상을 벽상에 높이 거는 일등공신에 기록되시고 그 뛰어난 공으로 부모님과 배위는 삼등공신으로 봉작되시고 또 아드님 한분의 벼슬은 7품격인 이부시랑에 선임되시고 전리판서로 양광도(지금의 경기도 일부)에 부임안무하셨으며 동북면도순문사를 위시하여 밀직부사계림부윤 전라도 도순문사를 역임하셨다.
처음에는 상성군에 봉군되시고 추성익위공신으로 추대받으시고 한편 백형득배 중형득제와 함께 세간에서는 소위 삼원수(三元帥) 집안으로 칭호되었다. 고려의 국운이 극에 이르자 두문동에 들어가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키시고 뒤에 상주산 양현으로 물러나 은거하셨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선생은 일찍이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어 전하기를 '우중에 내가 머무르니 술잔에 정은 깊어지고 짧은 반나절의 고담준론은 백량의 금보다 귀하도다. 다만 임금님 뵈옵기가 바빠가는 말을 재축하니 석양의 방초가 나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구나' 태조 7년 무인년(1398년) 3월 22일에 서거하시니 향년 81이시다. 동원 정호선은 묘제문에 약술하기를 '산천의 정기모여 좋은 집안 터전되고 종묘사직 맑게 하니 그 공은 높은 산과 같도다'라 하였고 목제홍여하(木劑洪汝河)는 많은 사서를 보고 논하기를 '덕망과 훈업은 백씨에 버금하며 수복의 공은 같으나 화는 함께하지 않았도다'라고 하였다.
묘소는 상주 개운동 임좌이시고 숙종 21년 을유년(1705년)에 후손 연(演)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시 비문을 짓고 판관 이징해(李징海)의 글씨로 음각하여 신도비를 세우셨다. 그 후 경종 5년 갑진년(1724년)에 후손 동필(東弼)이 경상도 관찰사로 도임하여 또 묘표를 세우니 명필의 백하 윤순(白下 尹淳)이 글씨를 쓰고 옛표석은 상석왼쪽에 묻었다.
또다시 경오년(1990년)에 후손들의 성금으로 비석과 석불을 갖추어 세웠다. 상주 귀호서원에 배향되시고 배위는 김제 조씨이며 파문 하사사와 보문각학사영회의 따님이시고 대호군지의 손녀이시며 진사연벽의 증손녀이시고 양어깨에 물고기 비늘같은 문양이 있으셨다. 기일은 4월 29일이며 묘소는 개운재사와 같은 산서편 임좌에 자리하시고 묘표는 후손 광우(光遇)가 상주목사로 재임시(1730년)에 세우셨다.
낙성군파(洛城君派) 파조(波祖)의 묘소 및 재실


■ 낙성군파(洛城君派) 파조 김선치(金先致)의 행적(行蹟)
◆ 11세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
▪ 생 몰 : 1318년(충숙왕 5, 무오) ∼ 1398년(태조 7, 무인)
▪ 가 계 : 상성군(商城君) 김록(金祿)의 3자
▪ 관 직 : 계림부윤(鷄林府尹)
▪ 과 거 : 음사(陰司)
▪ 군 호 : 낙성군(洛城君)
▪ 시 호 : 문충(文忠)
▪ 주요행적 :
1318년(충숙왕 5. 무오) 10월 15일 출생하시고. 문무를 갖추며 성장하던 중, 1329년 충숙왕(忠肅王 16) 사용하던 벼루에 『名先致年十二』라는 글을 남기고 벼루를 분실하였다. 17세에 산원으로 벼슬길에 나가 35세에 나주판관(羅州判官)
에 임명되고 이어 낭장(郎將)으로 전라도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 유탁(柳濯)
을 따라 왜구를 격퇴했으며, 그 뒤 호부낭중(戶部郎中)
이 되었다.
1359년(공민왕 8)에 도원수(都元帥) 이암(李嵒)을 따라 홍건적을 막으러 서경에 갔을 때 이암이 서경을 지키지 못할 것을 알고 창고를 불태우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그는 창고를 불태우면 적이 식량을 얻기 위해 오히려 국내로 깊숙이 침입할 것이니 옳은 계책이 아니라고 반대해 이를 중지시켰다.
1363년(공민왕 12)에 홍건적을 평정시킨 공으로 1등공신이 되어 그 형상이 벽상(壁上)에 그려졌고, 토지와 노비가 하사되었다. 뒤 이어 이부시랑(吏部侍郞)이 되어 양광도(楊廣道)를 안찰(按察)하였다. 그 때 재상이 남경(南京)의 궁궐을 헐어 백악(白岳)으로 옮기려 하자, 왕에게 “전날 남경을 지을 때 사람과 짐승이 피곤했는데, 이제 다시 헐면 백성들이 실망할 것입니다.”라고 의견을 밝혀 왕이 놀라 그 일을 중지시켰다. 전리판서(典理判書)를 거쳐 1365년(공민왕 14)에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었다. 그 뒤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이 때 오래 해결하지 못한 강도사건과 그 연루자 1백여 명에 대해 처결을 내렸다.
이후 상성군(商城君)에 봉해지고 추성익위공신(推誠翊衛功臣)이 되었다.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라 전라도도순문사가 되었고, 1373년(공민왕 22)에 삭방도도순문사(朔方道都巡問使)가 되었다.
1378년(우왕 4)에 낙성군(洛城君)에 봉해지고, 추충보절찬화공신중대광(推忠保節贊化功臣重大匡)이 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절의를 지켰고 뒤에 상주 산양현(山陽縣)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1398년(태조 7년) 무인년(戊寅年) 3월 22일 이르러 집에서 돌아가시니 나이 81세였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졸기(卒記)가 있다.
묘소는 상주시 개운동(開雲洞) 임좌(壬坐)에 있다. 신도비(神道碑)는 후손인 김연(金演)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도임하여 1705년(숙종 31년)에 세우고 글을 지었으며 글씨는 판관(判官) 이징해(李徵海)가 썼다. 묘표(墓表)는 후손인 김동필(金東弼)이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로 도임하여 1724년(영조 1년)에 세웠고 글씨는 예조판서(禮曹判書) 백하(白下) 윤순(尹淳)이 썼다.
배위(配位) 군부인(郡夫人) 김제조씨(金堤趙氏)는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조영회(趙令晦)의 여식이며, 대호군(大護軍) 조기(趙岐)의 손녀이며, 시조(始祖) 조연벽(趙連璧)의 증손녀로 절행(節行)이 있었고, 양쪽 어깨에 비늘무늬가 있었다.
생(生)과 졸(卒)은 전하지 않아 기록을 할 수 없었으나 비(碑)의 발견으로 1443년(세종 25) 3월 이전에 졸한 것으로 추정이 된다. 묘소(墓所)는 같은 곳 서쪽 언덕에 임좌(壬坐)에 있다.
묘표(墓表)는 처음 설치 한 것은, 비석 앞면에는 명문(銘文) <김제군부인조씨지묘(金堤郡夫人趙氏之墓)>, 후면(後面)에는 가운데 <효손(孝孫), 전조산대부 선공감 정 김상보 (前 朝散大夫 繕工監 正 金尙保)와 전 봉직랑 인순부 판관 김상안(前 奉直郎 仁順府 判官 金尙安), 측면(側面)에는 <정통8년 계해 3월 일 각립(正統八年 癸亥 三月 日 刻立), 1443년(세종 25) 3월 일 각립>, 이라고 하여 각립(刻立)하여 세웠는데, 이후 후손인 김광우(金光遇)가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도임해서 전에 것은 땅에 묻고 다시 세웠다.
명문(銘文)은, <신미후손광우개수각(辛未後孫光遇改竪刻)>, 1751년(영조27) 이었다.
이후 2021년(辛丑年) 5월 18일 땅에 묻은 비석과 향로석을 발굴하여 여러 후손이 참여하여 신미년(辛未年)에 설치한 비석의 우측(右側)에 다시 세웠으며, 향로석은 현재의 향로석 우측에 설치하였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중랑장 김추(金錘)이고, 2남은 한성판윤 김전(金銓)이고, 3남은 한성부윤 김균(金鈞)이며, 4남 전서(典書) 김승귀(金承貴)인데 백형(伯兄)인 문충공(文忠公) 김득배(金得培)로 출후(出后) 하여 뒤를 이었으며, 5남은 대호군(大護軍) 김승부(金承富)이며, 여식은 감찰사지평(監察司持平) 광주인(光州人) 노준경(盧俊卿)의 아들인 검교 의정부 우의정(檢校議政府右議政) 노숭(盧嵩)에 시집갔다.
상주 귀호서원(龜湖書院)과 파주 고려대전(高麗大殿)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규장각여조충렬록(奎章閣麗朝忠烈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상산지(商山誌)』,
『교남지(嶠南誌)』, 『상산김씨세보(商山金氏世譜)』

■ 전사청 건립(典祀廳 建立)
2018년 11월 30일 경상북도 및 상주시로부터 3억 5천만 원을 지원을 받아 건립 하였으며, 현판 글씨는 김천거주 청악(靑岳) 이홍화(李洪和) 대한민국 명인 146호 서예가 썼다.
◆ 개운재(開雲齋)
▪ 위 치 : 경상북도 상주시 소개운길 63-30 (개운동 240-2)
▪ 창건연대 : 1804년 (순조 4) 이전 (연대미상)
▪ 재건연대 : 1804년 (순조 4)
▪ 중건연대 : 1844년 (헌종 10)
▪ 중수연대 : 1899년 (광무 3)
▪ 보수연대 : 2009년 (번와)
▪ 중건연대 : 2018년 (전사청 건립)
▪ 건립(建立) 배경.
1804년 이전에 고려 충신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의 묘소를 수호(守護)하기 위해 지었다. 1804년 재건 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가 상량문(上樑文)을 지었고, 1844년 중건시 생원(生員) 채광우(蔡光禹)가 개운재 중수기문(開雲齋 重修記文)을 지었으며, 1899년 중수시 생원(生員) 김규석(金奎錫)이 중수상량문(重修上樑文)을 지었다.
▪ 개운재 최종 중건(2018년 戊戌) 과정.
2018년(戊戌) 11월 낙성군(洛城君) 탄신(誕辰) 700주년을 기념하여 개운재를 중건하고자 송호(松湖) 김우균(金祐均)은 경상북도에서 1억 7천5백만 원을 지원을 받았고, 상주시로부터 1억 7천5백만 원을 지원받아 총합계 3억 5천만 원의 지원금으로 기존 4칸의 전사청(典祀廳)이 허물어져 철거를 하였으며, 전사청 3칸으로 하여 신축 건립하게 되었다.
추후 지원금을 받아 동재(東齋)를 신축하고자 동편으로 담장을 5m를 확장하였으며, 서편의 담장도 철거하여 5m를 확장하여 공간을 마련하였고, 뒤편의 일부 석(石) 축대와 담장 둘레를 황토석 담장으로 모두 다시 쌓은 것이다.
▪ 개운재 상량문(上樑文)
1. 1804년(순조 4, 갑자) 10월16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진양(晉陽) 정종로(鄭宗魯)가 짓고, 후손 유학(幼學) 근(瑾)이 썼다.
2. 1844년(헌종 10, 갑진) 04월 19일 중수기(重修記)는 인천(仁川) 채광우(蔡光禹)가 짓 고, 후손 정임(鼎任)이 썼다.
3. 1899년(광무 3, 기해) 04월 07일 중수상량문(重修上樑文) 甲申年에 후손 김규석(金奎 錫)이 짓고, 김숙원(金肅源)이 썼다.

고려 추충보절 찬화공신 중대광 낙성군 김공 신도비
공(公)의 휘는 선치(先致)이고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여러 세대를 이어온 가업은 다 사책(史冊)에 실려 있다. 아버지 김록(金祿)은 원충 단력 안사 보정공신(元忠端力安社保定功臣) 벽상 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상성군(商城君)이고, 어머니 연창군부인(延昌郡夫人) 박씨(朴氏)는 대영서영(大盈署令) 박영(朴瑛)의 딸이다. 공은 원 나라 연우(延祐) 무오년(戊午年, 1318년 충숙왕 5)에 출생하셨으며, 17세에 벼슬길에 나가 나주 판관(羅州判官)에 되었다.
그 뒤 낭장(郎將)으로서 유탁(柳濯)을 따라 왜(倭)를 칠 때에 손수 수십 인을 죽였고, 호부 낭중(戶部郎中)으로 벼슬을 옮겼다. 공민왕 때에 홍건적(紅巾賊)을 평정하고서 1등에 녹공(錄功)되어 벽상(壁上)에 형상이 그려지고 토전(土田)과 노비를 하사하였으며, 이부 시랑(吏部侍郞)에 선임되었다. 외직(外職)으로 나가서는 양광도(楊廣道)를 안찰(按察)하였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는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상성군(商城君)에 봉해지고 추성 익위공신호(推誠翊衛功臣號)를 내렸으며, 동지밀직(同知密直)에 오르고 전라도 도순문사(全羅道都巡問使)가 되었다.
그 뒤 낙성군(洛城君)에 개봉(改封)되고 추충 보절 찬화공신호(推忠保節贊化功臣號)를 더하여 내렸는데, 형 상락군(上洛君) 문충공(文忠公) 김득배(金得培)ㆍ상산군(商山君) 김득제(金得齊)와 함께 다 원수(元帥)가 되어 구적(寇賊)의 환난(患難)을 평정하고 우리나라를 다시 안정시켰으므로, 세상에서 삼원수(三元帥)라 일컬었다.
고려가 망하게 되어서는 공이 상주 산양현(山陽縣)에 물러나 살다가 우리 태조 강헌대왕(康獻大王) 무인년(戊寅年, 1398년 태조 7) 3월 22일에 졸서(卒逝)하니 향년(享年)은 81세이며, 상주 개원동(開元洞) 병향(丙向)인 언덕에 묻혔다.
배위 군부인(郡夫人) 김제조씨(金堤趙氏)는 판문하사사 직보문각 학사(判文下司事直寶文閣學士) 조영회(趙令晦)의 딸이며, 묘는 공의 묘 서쪽 동일 국내(局內)의 다른 산등성이에 있고 좌향(坐向)은 같다.
아들 다섯과 딸 하나가 있는데, 아들은 김추(金錘)은, 김전(金銓)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이고 김균(金鈞)은 전농정(典農正)이며, 김승귀(金承貴)ㆍ김승부(金承富)는 대호군(大護軍)이다.
사위 노숭(盧嵩)은 벼슬이 정승(政丞)에 이르렀다. 공의 내외 자손은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으나, 오직 호군공(護軍公)의 후손에 김덕겸(金德謙)이 있는데, 벼슬은 동지중추(同知中樞)에 이르렀고 호는 청륙(靑陸)이며 문장(文章)으로 이름났다. 그 아들 김상(金尙)은 관찰사(觀察使)이며, 김덕함(金德諴)은 큰 절개와 깨끗한 조행으로 우리 인조(仁祖) 때에 이름나고 벼슬이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며, 증시(贈諡)는 충정(忠貞)이다.
그 아들 김설(金卨)은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이고, 그 아들 김우석(金禹錫)은 형조판서(刑曹判書)로서 곧 우리 선고(先考) 이상 삼세(三世)이니, 이분들은 자손 중에서 가장 드러난 이들이며, 영의정 이덕형(李德馨)과 좌찬성(左贊成) 정응두(丁應斗)와 우의정(右議政) 강사상(姜士尙)과 판서(判書) 송준길(宋浚吉)은 외손 중에서 크게 현달한 이들이다.아! 우리 선조(先祖)는 고려 때의 교목(喬木) 같은 세신(世臣)으로 나라가 망할 무렵에 나시어 자신이 장상(將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왕가(王家)를 안정시켜 널리 간난(艱難)에서 구제하였으므로 그 공적을 이룬 것이 태상(太常)에 기록되고 형제의 공명(功名)이 기린각(麒麟閣)
에 환하게 빛났으니 이는 참으로 고금에 드문 것이었는데, 은(殷)나라의 운수가 다하고 주(周)나라에 천명(天命)이 새롭게 있었던 것처럼 나라가 바뀌게 되어서는 어깨를 나란히 하여 주선하던 당시의 명공(名公)ㆍ석보(碩輔)들이 모두 운세를 타서 날개를 떨치고 천명을 도와 개국(開國)하여 존영(尊榮)을 누렸으나, 공은 홀로 초연하여 멀리 물러나 고향에 자취를 감추어 혹 상주에 산에서 고사리를 캐기도 하고 혹 낙동강의 물결에 낚싯대를 드리우기도 하며 스스로 추운 겨울철에도 (잎이 푸른 송백(松柏)의) 자태를 보존하였으니, 그 고상한 품격과 높은 절개는 길 야은『吉冶隱, 길재(吉再)』과 서로 엇비슷하면서도 더욱 위대하다 하겠도다.
이제 그 후손으로서 옛터를 계속 지키는 후손들이 쇠미(衰微)해져 떨치지 못하여, 해마다 11월에 모여서 묘소에 참배하며 향화(香火)를 폐지하지는 않으나, 묘역에 잡초가 우거지고 비지(碑誌)는 징거할 것이 없어 길 가는 사람들도 이를 한탄하고 상심하였는데, 공의 몰후(歿後) 3백 8년에 후손 김연이 선열(先烈)을 이어 이 도(道)의 관찰사가 되어서 묘소를 중수(重修)하고 석(標石)을 고쳐 세우는 한편 개요를 적어 그 후면에 새기는 바이다.
숭정무진(崇禎戊辰)(1628년) 기원후(崇禎紀元後)78년(1705년) 을유(乙酉) 계춘(季春)
음력 3월 10대손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겸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대구도호부사(嘉善大夫慶尙道觀察使 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大邱都護府使) 연(演) 삼가 글을 짓다.
대구판관(大丘判官) 이징해(李徵海)
글씨를 쓰다.
高麗推忠保節贊化功臣重大匡洛城君金公事蹟碑
嶺南과 湖西의 境界로서 尙州雄牧의 鎭山인 俗離靈峰의 支脈이 東南으로 뻗어 開雲大地가 열리고 洛東江支流로서 이 故庄 젖줄 北川 濫觴의 細溪가 띠를 두르듯 잔잔하게 흐르며 龍虎가 造化를 이룬 아름다운 곳이 있다. 여기 壬丙의 明堂은 商山世家의 麗末 三元帥로 文忠公 得培, 商山君 得齊, 洛城君 先致는 世上에 널리 알려졌으며 季公 洛城君의 英氣가 서려 있는 千年幽宅이다.
公의 諱는 先致이고 商山金氏로서 字號는 不傳이다. 上系는 高麗甫尹 諱 需가 始祖이시고 七世를 지나 諱 鎰은 輸忠秉義協贊功臣重大匡贊成事大護軍으로 贈上洛君이 祖考이시며 考의 諱는 祿이시니 左代言으로 贈元忠端力安社保定功臣 壁上三韓三重大匡門下侍中尙城君이고 妣는 延昌郡夫人竹山朴氏로 大盈署令 瑛의 따님이다. 西紀 一三一八年 戊午十月十五日에 태어나시니 天資秀美하였다.
十二歲에 習作으로 쓰시던 벼루가 지금도 남아 있어 歷史的 資料로 인정받아 慶尙北道 有形文化財 第三八四號로 指定되었으며 善良한 관리로 보관중이다.
外裔孫 晉陽鄭宗魯를 비롯한 後學들의 硯記와 硯銘 硯詩 등 韻散文 四十餘題가 남아 있으니 由緖 깊은 情緖에 驚嘆을 禁할 수 없다. 十七歲에 初仕로 散員이 되고 都官과 吏部의 벼슬을 거쳐 壬午에는 郞將으로 全羅道巡問使 柳濯을 따라 倭寇 격퇴에 功을 세웠다. 壬辰年에는 羅州判官으로 在任하면서 地方勢家의 横暴에 依하여 賤人으로 전락한 百姓을 良人으로 處決하여 칭송을 받았다.
己亥에는 戶部郎中으로 都元帥 李嵒의 揮下에서 不焚府庫의 良策을 上奏하여 나라에 貢獻 하였으며 그해 겨울 鴨綠江을 건너 침입하는 紅巾賊 二萬餘名를 斬殺하는 大勝을 거두었다. 다음해 楊廣道按廉使가 되었고 恭愍王遷都說의 폐단을 事理에 맞는 開陳으로 挽留시켰으며 癸卯에는 紅巾賊擊走 一等功臣에 策錄되고 土地와 奴婢를 下賜받았다. 곧이어 典理判書가 되고 東北面都巡問使에 拜命되었으며 密直副使에 승진되고 다음해 鷄林府尹이 되어 尙城君에 封해지고 推誠翊衛功臣이 되었다. 全羅道巡問使와 衛尉判事로 同知密直司事에 올랐으며 朔方道都巡問使에 拜命되었다.
一三七八年 戊午에 洛城君에 封爵되고 推忠保節贊化功臣이 되었다. 杜門洞實記에 金先致 商山人 諡文忠으로 登載되고 또한 蒼石 李先生 商山誌에도 金先致 洛城君 我朝 諡 文忠이라하였다. 壬戌에는 高麗의 衰亡을 예견하고 杜門洞에 들어가 李氏王朝의 改創을 反對하였으며 高麗遺臣으로 志節을 지키다가 晚年에는 尙州의 山陽에 落鄕하여 悠悠自適하니 太祖大王께서 節義를 아름답게 여겨 쌀과 田宅을 내리셨다. 一三九八年 戊寅 三月二十二日 逝世하시니 八十一歲를 享壽하셨으며 朝鮮王朝 實錄에 卒記가 수록되었다.
配位는 金堤郡夫人 金堤趙氏로 判門下司事寶文閣學士 令晦의 따님이고 同局西岡 壬坐에 安葬하였다. 五男一女를 두셨는데 長男 錘는 中郎將이요, 次男 銓은 嘉善大夫漢城判尹을 역임하셨고 三男 鈞은 漢城府尹이다. 四男 承貴는 典書로서 伯父 文忠公의 系子가 되었으며, 五男 承富는 大護軍이요 壻郞盧嵩은 光州人으로 議政府參贊에 檢校右政丞이다.
曾孫 思勳은 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贈禮曹判書이며 乙孫은 武科로 慶尙道節制使를 역임하였다. 七世孫 德諴은 大司憲 贈吏曹判書 成均館 大提學, 淸白吏에 錄選되었으며 諡는 忠貞이다. 九世孫 寭는 豐基郡守를 역임하였다. 十世孫 演은 慶尙道觀察使와 禮曹判書이며 十一世孫 東弼은 六曹判書를 역임하고 諡는 忠惠이다.
繁多한 後孫의 記錄을 줄이고 다만 裔孫中에 桂榜이 二十二人이요 蓮榜이 五十九人이며 虎榜이 七人이니 진실로 文武相傳의 大門閥이다. 돌아보건대 洛城君金公은 資性이 英明하고 豪放하며 才藝는 文武를 兼備하여 麗末의 道學文章과 忠節로 當世宗匠인 圃隱 鄭夢周, 牧隱 李穡, 惕若霽 金九容 등 三先生과 道義相交하여 詩文을 唱酬하였다. 圃隱께서는 贈尙州金相國先致 題目으로 “雨中留我酒盃深。半日高談直百金。只爲朝天促去驥。夕陽芳草惱人心”의 간절한 詩를 남기셨다. 世人들이 麗末의 三功臣은 智德을 함께 갖춘 儒將이라 하였다.
公이 逝世하시고 三百餘年이 지난 一七O五年 乙酉季春에 十世孫 演이 글을 지어 神道碑를 세우고 다시 三百餘年이 지난 오늘날 前大宗會長 璋熙氏와 洛城君派宗中 首席 副會長 祐均甫가 宗中의 뜻을 모아 誕辰 七百週年을 記念하여 事蹟碑를 세우고자 不佞에게 碑文을 請하였다. 淺學의 所任이 아니라고 固辭하였으나 不得하여 譜牒과 資料를 詳審, 위와 같이 敍述하고 삼가 銘을 드린다.
商山世德 뚜렷해라 海東望族이 아닌가
三元帥의 文武才德 나라 안의 으뜸일세
靑氈舊物 古硯保存 文化財로 指定받아
洛城君의 手澤서려 追慕의 情 아득해라
紅巾賊을 몰아내서 一等功臣 되었으며
高麗遺臣 갸륵한 뜻 杜門隱退 하였다네
開雲明基 千年幽宅 松與栢이 蔚然하다
山川精氣 可觀이라 雲仍들은 益暢하리
西紀 二千一八 戊戌 菊秋節 上弦 成均館副館長 安東 金昌會 謹撰
題字 大韓名人 靑岳 李弘和 謹書
◆ 낙성군(洛城君) 김선치(金先致)의 벼루(硯)
▪ 소 재 지 : 경상북도 상주시 개운동 240-2 (상주시 소개운길 63-30)
▪ 소 유 자 : 상산김씨 낙성군파 종중
▪ 문화재 지정 : 경상북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384호 (2006. 06. 29.)
▪ 수 량 : 벼루, 벼루 집, 뚜껑 각1점
▪ 시 대 : 고려시대(1329년)
▪ 재 질 : 고산석
▪ 벼 루 크 기 : 가로 10.8cm × 세로 19cm × 높이 1cm
▪ 벼루집 크기 : 가로 13.7cm × 세로 22.8cm × 높이 5cm
이 벼루와 벼루집은 낙성군 김선치(1318~1398)의 유물로, 벼루 뒷면에 『명선치년십이(名先致年十二)』라 음각하고 수결을 해 놓았다. 이는 1329년(고려 충숙왕 16)으로 재질은 고산석이다. 낙성군(洛城君)의 벼루를 되찾은 것은 1762년 8월22일 이요. 벼루를 되찾은 사실을 공포 하여 연시문(硯詩文)을 받기 시작한 것은 14세손 김담(金湛)이〈연시(硯詩)〉와 〈연기(硯記)〉를 쓴 동년(同年) 12월 2일 부터다. 이들 시문이 수록된 책은 두 권이 있는데, 하나는 『낙성군선조고연운(洛城君先祖古硯韻)』으로, 시종(始終)에 연기(年記)가 없다.
또 하나는 『상산세적(商山世蹟)』 권이(卷二)의 『문충공낙성군유적(文忠公洛城君遺蹟)』인데, 이 책의 서문은 시려(是廬) 황난선(黃蘭善)이 1908년(순조 2)에 썼다. 전자의 연대에 수록 된 김담(金湛)의 연기(硯記)로 보아 1762년 12월 2일이 시작이요. 『낙성군선조고연운(洛城君先祖古硯韻)』에 실린 후손(後孫) 만해(晩海) 김기섭(金基燮)이 (1891~1884)까지 살았고, 그 바로 뒤에 쓴 임필수(林馝泆)이 무인년(戊寅年)에 썼음을 밝히어 이 책이 완성된 것은 1878년(고종 15) 무인(戊寅)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보면, 연시(硯詩)는 백여 년간이나 차운자(次韻者)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낙성군선조고연운(洛城君先祖古硯韻)』에는 연시(硯詩) 30인이 37수, 연가(硯歌) 1인 1수가 기록되었고, 『상산세적(商山世蹟)』에는 연기(硯記) 7인 7편, 연구시((硯句詩) 2인 1수, 연행(硯行) 3인 3편, 연시(硯詩) 13인 13수, 연명(硯銘)은 1인1편이 기록되었다. 이 두 책에는 중복된 분이 많아 전체적으로는 총 45인이 기(記)·시(詩)·행(行)· 명(銘) 등의 운문(韻文)과 산문(散文) 49제(題)를 남겼다.
낙성군(洛城君) 벼루를 사백여 년 만에 찾은 신기함과 벼루의 소중함을 귀히 여겨 1768년(영조 44) 문경현감(聞慶縣監)이 벼루 집을 오동나무로 만들어준 사실이다. 벼루 집을 보내며 만든 이유를 밝히었으나, 당시의 기록문(記錄文)을 잃어서 뒷날에 다시 써 두었는데, 1768년(영조 44) 무자(戊子) 9월 8일에, 문경현감(聞慶縣監)이 갑(匣)을 만들어 보내 주었다. 소중한 벼루가 있다는 사실이 일단은 기이한 까닭에 모름지기 오래 보전하기를 위해서였다. 무인년(戊寅年) 10월 4일에 다시 쓴다. 라고 기록이 있다. 1768년 이후의 무인년(戊寅年)은 1818년(순조 18)과 1878년(고종 15)의 두 해가 있는데, 『낙성군선조고연운(洛城君先祖古硯韻)』이 완성된 해가 1878년(고종 15)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