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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종중회 소개
휘 운보(云寶)
랑장 휘 언(彦)공의 장자로 익대개국원종공신으로 보국숭록대부영중추부사를 지내셨으며 겸하여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사감의 영사를 역임하셨다. 초휘는 벌대(伐大)이고 충숙왕 계유년(1333년) 출생하셨다. 황조로부터 이름은 삼이요 자는 광국(光國)이며 호는 죽헌(竹憲)이라고 하사받으셨다.
고려말에는 중랑장으로서 왜적을 토벌한 공훈을 세우셨고 홍두적을 막아 경성을 수복하신 공으로 원종공신되셨으며 녹봉으로 전답오십결을 받으시고 고을 관장에게 왕이 명하며 그 공을 기록한 비석을 세우는 일을 관장토록 하였다. 공신록에 오르고 명신록과 여지승람무령(영광) 지삼강록에 사적에 등재되었다. 태종 2 임오년(1402년)에 운명하시니 향년 칠십이시고 묘소는 영광군 외동면 지금은 장성군 동화면 수연산 종련암 남쪽 건좌에 예장되었다.
처음 재사는 동화면 서양리에 있었으나 신사 이천년 봄에 동화면 동호리에 다시 세웠고 석물은 모두 갖추어 있다. 공의 행장은 고가심이 글을 짓고 묘표는 참찬 유최기가 지었다. 배(配)는 정경부인 도강조씨로 대호군수의 따님이시고 남경봉향사건의 손녀이시고 은산군한훤당안의 증손이고 묘소는 합부이시다.
■ 영중추공파(領中樞公波) 파조(波祖)의 묘소 및 재실

■ 영중추공파(領中樞公波)
▪ 파 조 : 휘(諱) 운보(云寶)
▪ 생 몰 : 1333년 충숙왕 1년 ~ 1402년 태종2년
▪ 가 계 : 의정부(議政府) 우의정(右議政) 언(彦)의 장남
통사공(統使公) 파조 신보(臣寶)가 실제(實弟)이다
▪ 관 직 :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 과 거 : 음사(蔭仕)
▪ 군 호 : 익대(翊戴)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 시 호 : ·
▪ 주요행적 :
고려시대 정6품 무관직(武官職)인 랑장(郞長)을 거쳐 증(贈) 우의정(右議政)을 지내신 언(彦)의 장자(長子)로 임금을 보좌하고, 새 임금을 맞이하는데 추록(追錄)되어 인정 받으신 익대개국원종공신(翊載開國原從功臣)으로 후일에는 보국숭록대부(輔國崇錄大夫)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왕명이나 군사기밀을 담당하는 2품 벼슬)를 지내셨고, 겸(兼)하여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의 품계(品階)와 직첩(職牒)를 받으셨다.
초휘(初諱)는 벌대(伐大)이고, 자(字)는 국광(國光)이며, 호(號)는 죽헌(竹軒)이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2년 계유년(癸酉年)(서기 1333년)에 출생하셨다. 고려말에는 중랑장(中郞將)으로 외적(外敵)을 토벌(討伐)하여 공(功)을 세웠으며,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하여 개경(開京)을 수복(收復)하는데 혁혁(赫赫)한 공(功)을 세웠다. 고려 우왕(禑王) 8년 임술(壬戌)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전의사사(典儀寺事)를 거쳐 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庚午)에 봉익대부(奉翊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로 제수(除授) 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정에서는 전오십결(田五十結) 하사(下賜)와 공적(功蹟)을 새긴 비(碑)를 세우고 예장(礼葬)하셨다.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왕조(高麗王朝)는 망하고 이씨왕조(李氏王朝)로 바뀌어 태조(太祖) 4년 2월 7일 봉교행(奉敎行) 가정대부(嘉靖大夫) 검교(檢校) 중추원(中樞院) 부사(副使) 겸(兼) 판사복사사(判司僕寺事)를 역임(歷任) 하셨으며, 관명(官命)에 의(依)하여 영중추공파(領中樞公波)라 칭(稱)하고, 사후(死後) 공(功)을 인정받아 공신록(功臣錄)과 명신록(名臣錄), 여지승람(輿地勝覺) 사적(事蹟)에 등재(登載)되었다. 태종(太宗)2년 임오(1402년)에 운명(殞命)하시니 향년(享年) 칠십(七十)이시고, 묘소(墓所)는 영광군 외동면 인데 지금은 장성군 동화면 수련산 종련암 남쪽 건좌(乾坐)에 예장(禮葬)되었다. 행장(行長)은 고가심(高可諶)이 찬(撰)하고 묘표(墓表)는 참찬(參賛) 유최기(兪最基)가 지었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도강조씨(道康趙氏)인데 대호군(大護軍) 수(琇)의 따님이시고, 남경봉향사(南京奉香使) 건(健)의 손(孫)이고, 은산군(銀山郡) 한훤당(寒暄堂) 안(按)의 증손(曾孫)다. 묘소는 합폄(合窆) 이시다. 처음 재사(齋舍)는 동화면 사양리 있었으나, 신사년(2000년) 봄에 동화면 동호리에 다시 세우고 석물(石物)을 모두 갖추었다.
[(명신록(名臣錄), 여지승람(輿地勝覺) 무령삼강록(武靈三綱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