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정려
영중추공파 12세 휘 우생 공 화암사 배향
영중추공파 12세 휘 우생 공 화암사 배향
공은 영중추부사 휘 운보(云寶)공의 삼자로
자는 문숙(文叔) 호는 양산(陽山)이고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벼슬을 하시다.
공민왕 임자 1372년10월 3일에 탄생하시고 조선태조가 요동을 치려할 때 공의연세 17로서 역사와 대의를 밝혀
백의 상서하시다 포은 정선생으로부터 몸을 단속하고 마음을 닦아 충효두자를 받고 선생의 휘일을 맞이 할 때마다
설위통곡하시며 또한 선생의 유상을 흠모하시고 조석으로 우러러보며 공경하시다 병자 1396년에 순천부사에
제수되시고 세종4년 임인 1422년7월에 왜선이 전라 충천해 도중에 출몰하자 이에 간궁으로 화살을 쏘고 화포를
발사하시다 왕은 상호군공을 전라도 해도찰방으로 삼으시고 공등에게 내약을 하사하시며,
또 명하시여 사나운 바다기운이 그대들에게 두렵다 하시고 그 도에 가서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시며 마침내
각 도 감사로 하여금 술과 고기를 준비하여 보내도록 하시었다. 태종시 박포무리의 반역을 당하여 시 三수가 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다 그 글귀를 믿었다.
임오1402년에 외간을 당하시어 3년간 시묘하시고 세종 을묘 1435년에 사간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시다 단종 갑술 1454년에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불취하시고 가례연의를 수집하시며 훈몽요어를 보안하시고 또 문집二권도 있다.
이와 같은 일이 포은 정선생의 문집에 보이며 사육신과 함께 도의를 위하여 교유하시다 일찍이 백의 숙제일을
논하시는데 당년이 되어 말을 치며 감히 아니다 말하고 대의는 당당히 일월처럼 빛난다 초목 또한 주나라 우로에
젖었거늘 수양땅 고사리를 먹는 것이 군자는 오히려 부끄럽다 하는 귀절이 있다 세조 3년 정축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영월에서 승하하시자 공은 입산통곡하시고 11월 15일 영월을 향하여 절 4배하시며 약을 마시고 돌아가시니
향년 86이시다.
이와같은 사실이 장릉지 및 해동충효록에 보이며 공의 행장기록은 익찬황윤석이 지은 글이고 묘표는 참판 이홍재가
지은 글이다 향사는 나주 도림면 지금의 광주직할시 대산동 가산 화암사에서 행하고 있다.
무진1968년에 조령으로 사우가 훼철되고 고종 을미 1895년에 문집을 거듭 간행했으며 무신1908년에 사우를 다시
세웠고 송사기우만이 서문을 지으시다 이와같은 사실이 문헌록에 기재되어 있다 묘는 나주 도림면 지금의 광주직할시 희여산 하에 간좌로 모셔있다.
석물이 갖추어 있으며 동명은 세칭 양산동이다 숙부인 금성 오씨는 참의영달의 여이며 중랑장 계직의 손녀이고
중랑장언의 증손녀이다 묘는 지금의 삼도동 야동록 오륜개에 계좌로 모셔있으며 석물이 갖추어 있다.